수필가

마지막 가랑잎마저 바스락거리며 시린 흙으로 돌아간다. 이제야 본바탕을 내보이는 나무는 차가워질수록 되려 담백해지고 선명해진다. 한 계절 내내 수없이 끌어당겨 마음을 빼앗던 고운 단풍, 그것은 어쩌면 떨켜로 인해 나무와 단절되는 처절한 아픔의 몸짓이 아닐는지,

떨켜는 잎을 스스로 떨어트리는 매듭이다. 나무는 혹독한 겨울에 수분을 저장하기 위해 미련 없이 잎새를 떨군다. 수분을 공급받지 못한 잎새는 더 버티지 못하고 떨어진다. 나뭇가지에 대한 미련도 아쉬움도 모두 내려놓는 잎새의 순응이 아름답다.

‘버려야 할 것이/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도종환 시인의 ‘단풍 드는 날’ 이다

잎새는 이렇게 사계절의 변화에 순응하며 자신을 버리고 죽어서도 거름이 되어 새 생명을 위해 희생한다.

내 삶에서도 떠나보내야 할 것을 보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단 하나 있다.

일찍이 소천한 남편 대신 아이들에게 기대 사는 나는 아이들이 결혼으로 내 곁을 떠날까 봐 벌써 걱정이 앞선다. 둘 중 하나만이라도 곁에 두고 있어야 안심이 되고 안정될 것만 같다. 모두 떠나면 어떻게 혼자 살아야 할지 그 무게가 벌써 전이되어 온다. 엄마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아들은 결혼하더라도 엄마와 합가하여 살겠다고 하지만 합가는 서로가 불편할 것 같아 내가 반대하는 처지다. 생각 끝에 지금 사는 아파트에 옆 동에 아파트를 하나 더 사려고 생각 중이다.

이런 나를 두고 친구는 그것은 집착이라며 일침을 놓았다. 친구의 단호한 충고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식은 태어날 때 탯줄을 자르고 엄마와 분리되어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살아간다. 자녀와 두 번째 분리는 결혼이다. 사랑하는 자식에게 결혼은 둘만의 안온한 색깔로 둘만의 감정으로 세상을 채색해 나가야 한다. 그런데 그 색깔에 엄마의 색깔이 혼합된다면 과연 아름다운 색상으로 완성될까.

오랫동안 생존하기 위해 스스로 수분 공급을 제한하고 해로운 생물의 침입을 막기 위해 보호층을 형성하는 나무가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다시 새봄을 맞이하는 나무처럼 사람도 자신의 몸에 붙어사는 것들을 떨쳐내야 할 때가 있다. 인생의 방향을 새롭게 바꾸는 변곡점인 시기에는 그동안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었던 것을 미련 없이 털어내야만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자식과 잘 이별하지 못한다면 그 결과로 내 삶은 없고 자식을 위해 곁에서 맴돌다가 이 세상과 작별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우리 인생도 나무처럼 떨켜가 형성되어 때가 되면 삶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내 아이들이 나를 떠나 스스로 서고 저마다의 길을 가도록 떨궈야 하는 일, 그 밖에도 일과의 이별, 묵은 생각과 서운함과의 이별, 사물과의 이별에서 두려움이 없는 떨켜가 필요하다.

버려야 할 것을 아낌없이 버릴 때 진정한 자유가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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