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시인

 

[충청매일] 문제는 국적 불명의 이 문장이 지난 세월 40여 년 동안 고등학교 국어책에 실려 우리 문장의 전형으로 10대 젊은 사람들의 영혼을 벽돌처럼 찍어냈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선언서는 이 세상에서 학교 다닌 모든 학생이 외워야 하는 문장이었습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이 나라의 젊은이들이 가장 발랄한 사고를 해야 할 시점에, 이 최악의 문장을 우리 말글의 본보기 문장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는 문장을 보면 <의>의 용례가 우리가 쓰던 말과는 다릅니다. <조선의>의 <의>는 주격이고, <조선인의>의 <의>는 목적격입니다. 이런 문장은 우리말에는 없습니다. 영어와 일본어의 문장입니다. 영어와 일본어가 짬뽕이 된 문장구조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문장을 외운 사람이 일본어와 영어를 자연스럽게 우리말의 짜임으로 받아들일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말이 우리말의 짜임으로부터 멀어지고, 남의 나라 문장의 짜임을 받아들이도록 첫 번째 물꼬를 터준 것이 바로 ‘기미독립선언서’입니다.

게다가 문장의 꼬락서니를 보십시오. 국한문혼용으로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우리말과 한자말은 ‘두시언해015같은 번역서 외에는 섞인 적이 없습니다. 이러던 것을 우리말과 한자말을 뒤섞어서 이게 어느 나라 말인지 알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한 번 얘기하겠지만, 이것은 일본어의 영향입니다. 일본어는 한자를 쓰기 때문에 거기에 익숙한 사람들이 우리말에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방금 제가 한 ‘기미독립선언서’ 비판은, 학자들이나 딴 사람들이 말한 것을 보고서 여러분에게 소개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지난 세월 살아오면서 고등학교 때 배우고, 그 뒤로 국어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며 느낀 점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이 저만은 아니었는지, 1990년대로 접어들면 이 ‘기미독립선언서’가 국어 교과서에서 슬그머니 빠집니다. 지금은 이 글을 실은 교과서가 거의 없을 걸요?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 썩은 문장을 걷어내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이 문장으로 배움을 터득한 후배들이 그 뒤로도 우리말의 문장을 다듬어 지금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접하는 글들에서 기미독립선언서의 썩은내가 아직도 진동합니다.

이런 따위의 문장은 그 뒤로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단골 말투로 쓰이다가 1969년 박정의 정권의 도구로 이 세상의 모든 교과서 맨 앞에 실린 <국민교육헌장>으로 승화됩니다. 저는 국민학교 2학년 때 이걸 외우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머리가 나쁜지 잘 안 외워져서 60명 정도 되는 우리 반 학생 중에서 제가 꼴찌에서 두 번째로 암기를 완성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제 머리가 중간쯤은 갔는데, 선생님의 손에서 흔들거리던 몽둥이에 머릿속이 하얘져서 결국은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던 기억이, 환갑을 넘긴 지금에도 또렷합니다. 개새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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