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은행나무길을 꼭 한번 걸어보리라는 다짐이 11월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은행나무길로 향하는 내내 달뜬 마음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한 시간 반 만에 도착한 은행나무길은 만추에 물들어 있었다. 아쉽게도 은행나무는 이미 돌아누웠다. 너무 늦게 찾아왔다. 순금 빛 은행잎을 떨군 나무는 앙상한 가지만 남긴 채 나목으로 객을 맞이했다.

나무 밑동으로 떨어진 은행잎은 내년의 화려함을 간직하고 단풍에서 낙엽으로 생을 뒤집는 중이었다. 빛바랜 은행잎은 저수지 한쪽 길에 노란 융단을 깔아 놓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었다. 잎은 떨어졌지만, 은행 나뭇가지 사이로 비추는 늦가을 햇볕이 따뜻했다.

만추의 1번지 문광저수지, 사계절 변주곡을 울리는 은행나무에 비해 변함이 없는 저수지는 정적(靜寂)이다.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을 품어 안은 저수지는 작은 일렁임조차 없이 잔잔하다. 저수지 안 좌대에는 인적은 없고 수십 개의 낚싯대만 입질을 기다리고 있다.

저수지 주변으로는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어 걷기에 그만이었다. 산 아래 잔도 길은 물 내음과 숲 향기가 피어올라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반영에 흔들리는 수상 식물을 바라보며 걷는데 갑자기 ‘휘리릭’ 산바람을 타고 낙엽이 우수수 온몸을 감싸 안는다. 기분 좋은 낙엽 비이다.

이런 비라면 온종일 맞아도 기분 좋을 것만 같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비를 맞아야만 했던가,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때로는 피하지 못하고 노배기가 되어 살아야만 했던 지난날, 왜? 그래야만 하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저 심재 굳은 은행나무처럼 심지를 굳히고 흔들리지 않았다.

비가 온 땅이 더 굳듯이, 비 갠 뒤 하늘이 더 맑고 깨끗하듯이 참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내일의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끔 불어오는 바람이 오늘처럼 싱그럽기는 처음이다. 낙엽 비는 뻣뻣이 굳어있는 몸과 마음에 만추의 향기를 뿜으며 춤추듯 다가왔다. 가슴속에 만남을 그리워하듯 낙엽은 마음의 소리를 담고 있다. 이리저리 날리는 낙엽을 잡아보려 손을 뻗었다. 걸음은 자꾸 앞으로 나아가는데 낙엽은 자꾸 뒷걸음쳐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이것이 지금까지 살아온 나와 삶과의 줄다리기인 듯싶다.

흩날리는 낙엽이 데크 길에 쌓인다.

쌓여가는 낙엽을 보니 구르몽의 시 ‘낙엽’ 한 구절이 생각이 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발로 밟으면 /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가까이 오라 / 우리는 언젠가 낙엽이니

가까이 오라 /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가을은 떠나야 하기에 아쉬움으로 낙엽 비를 내린다. 낙엽 비로 융단을 깔고 계절과 화려하게 이별을 한다. 이 낙엽 비가 그치고 나면 겨울은 찬비를 데려올 것이다. 나의 남은 날들에 꽃비가 아니더라도 낙엽 비가 내려주기를 기원하면서 이 가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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