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충청매일] 눈도 떼어내고 살점도 떼어냈다. 허우룩한 몸뚱이에 음산한 기운마저 돈다. 알몸을 드러내니 햇덧에 더욱 을씨년스럽다. 이사 갈 집을 수리하는 중이다. 누더기가 된 집이 그나마 품위를 잃지 않는 것은 전 주인이 잘 가꾸어 놓은 잔디 정원과 보랏빛 아스타 무리, 돌계단 바로 옆 국화 한 무더기 덕분이다.

열여섯 여자아이의 젖꼭지처럼 봉긋한 국화 봉오리에 가을볕이 내려앉고, 이제 막 손가락을 펴기 시작한 꽃에는 벌들이 몰려와 간지럼을 태운다. 꽃봉오리도, 이미 핀 꽃도 어느 것 하나 예쁘지 않은 것이 없다. 저들끼리 잘나고 모자람을 시샘하지 않는다. 인간처럼 서로 비교하고 시기 질투를 했더라면 아마 생채기가 난 꽃도 있으련만 모두가 한결같다.

돌계단 아래 이름 모를 꽃이 눈에 띈다. 분명 잡초다. 제자리가 아닌 곳에서 철 지난 꽃을 피운 것도 그렇고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꽃대가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보아 잡초가 틀림없다. 눈에 거슬릴 법도 하건만 나도 모르게 그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어찌 그리 당당할 수 있을까. 차마 뽑아낼 엄두를 내지 못한다. 파란 잔디와 보랏빛 아스타, 바로 옆 노란 국화의 화려함에도 굴하지 않고 파리한 꽃대를 피워올렸다. 아니 이미 이 세상을 하직했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어쩌다 여기까지 씨앗이 날아와 주인이 이사하느라 분주한 사이를 틈타 때늦은 제 삶을 영위할까. 하긴 주인이 있었다 한들 누구의 눈치를 보았을 리도 만무하지만 말이다.

엊저녁 몰아닥친 때 이른 추위를 용케도 잘 견뎌냈으니 사기가 충천한 모양이다. 누가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옆에 있는 화려한 국화에 주눅 들지도 않고 꼿꼿이 서서 ‘나 여기 있소.’하고 자신의 존재를 나타낼 뿐이다. 남을 의식하지 않으니 존재감이 더 드러난다. 당당함이 아름답다.

질레지우스의 말대로 ‘장미는 그 자신에도 관심이 없고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지도 묻지 않는다’고 하더니 국화도 아스타도 잡초꽃도 그렇다. 진정으로 아름다움을 간직한 것들은 모두 그런가 보다. 왜 피었는지 이유나 목적이 없다.

내가 초라하다고 느낄 때 나는 잡초꽃처럼 당당하지 못했다. 누구보다 돋보이고 싶은 적도 있었을 것이다. 초라하다고 생각하든, 돋보이고 싶든 모두가 타인을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다. 인간이 아무리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지만 누구나 각자의 본질을 갖게 마련인 것을 자신의 본질을 망각하고 타인과 비교하면서 가슴 아파하고 안달하며 살진 않았는지 가슴이 뜨끔하다.

‘타인의 시선은 곧 나의 지옥’이라는 사실을 사르트르는 이미 알고 있었다. 말 없는 국화나 이름 모를 잡초꽃이 부럽다. 아니 절로 고개가 숙어진다. 서로 비교하고 시샘하는 시선이 없으니 그들에게 지옥이란 있을 수 없다. 그들의 삶이란 얼마나 경건한 것인지. 모양이나 색깔 때문에 꽃이 예쁜 것이 아니라 늘 그 자리에서 그렇게 제 갈 길을 묵묵히 살아내고 있어 아름답다. 타인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들에게 세상은 날마다 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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