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시인

 

앞서 이희승 일파가, 남한의 문법 용어를 모두 한자로 하는 바람에, 오늘날 문법이 어려워졌다고 말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드는 생각이, 바로 영어문법이 우리말에 끼친 영향입니다. 원래 영어에도 문법이 있고, 우리가 영어를 배우자면, 영어의 품사론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문법체계를 번역하여 씁니다. 당연히 우리 문법에서 쓰는 용어로 번역하겠지요. 예컨대 영어의 <Verb>는 <동사>로 번역하여 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말에 <동사>라는 말이 없고, <움직씨>라는 말만 있었다면, 영어의 <Verb>는 오늘날 <동사>가 아니라, <움직씨>라고 번역하여 쓸 것입니다. 결국 해방 직후에 만들어진 품사용어가, 영어문법을 번역할 때도 영향을 미쳤고, 그 영향이 다시 우리말로 돌아와, 우리말의 문법이 홍역을 겪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영어를 배우면서, 가장 당혹스러웠던 것이, 우리말에는 없는, 영어만의 독특한 특성들이었습니다. 예컨대 <관계대명사>나 <현재진행>은 물론, <과거완료>까지, 우리말에는 없는 영어만의 특징을 이해하느라고, 머리를 쥐어짠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영어문장을 배우면서, 우리말도 거기에 물들어갑니다. 예컨대, <하고있다>는 말은, 영어의 현재진행형입니다. 현재의 동작이 진행중임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 있다>는 투의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굳이 쓰자면 <하는 중이다.>라고 썼죠. 그런데 영어에 있는 이런 특징이, 영어문장을 우리말로 옮길 때, 그대로 나타면서, 마치 그것이 옛날부터 있어온 문장인 양 행세하는 겁니다.

예컨대 <먹었다>가 과거형이라면, <먹었었다>고 하여, <었>을 하나 더 집어넣어서, <완료형>을 만들어보는 방식입니다. 그러면 <었>을 하나 더 집어넣어서, <먹었었었다.>고 하면, 과거완료형의 고려시댓적 표현이 되나요? 과거완료형의 고조선 시댓적 표현을 하자면, <먹었었었었다.>고 하면 될까요? 이게 얼마나 웃기는 생각입니까? 그런데 영어문법에서 흘러든 체계가, 오늘날의 우리말에 큰 영향을 줍니다. 그리고 국어학자들이 정당화하는 주장을 자꾸 해댑니다. 학자들까지 주장하고, 현실에서 그렇게 쓰이자, 이게 정말 우리문법으로 자리 잡습니다. 이러면서 우리말은 점차 영어를 닮아갑니다.

영어는 8품사입니다. 명사, 대명사, 동사, 형용사, 접속사, 한정사, 전치사, 감탄사. 우리말은 9품사입니다. 이름씨, 대이름씨, 셈씨, 매김씨, 어찌씨, 그림씨, 움직씨, 토씨, 느낌씨. 굴절어인 영어에는 없는, 토씨(조사)가 하나 더 있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접속사나 전치사는 우리말에는 없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그런 공부를 영어에서 끝없이 하다 보니, 우리말에도 영어에서 익숙해진 개념이 자꾸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착어인 우리말의 특징을 지켜야 한다고, 학자들이 나서서 꾸짖어야 하는데, 그걸 또 뒤따라가며 합리화시켜 줍니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끊어야 할지 참 난감합니다.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을 보면, 우리말의 모습이 아주 잘 살아있어서, 오늘날의 이 혼탁한 말을 버리고, 우리가 돌아갈 곳이 있다는 다행스런 생각이 듭니다. 조선시대의 말을 연구하고, 영어와 일본어의 영향을 받기 전의 문장들을 읽어보면, 충분히 우리말의 특징을 잘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에게만 고향이 있는 게 아닙니다. 말에도 고향이 있습니다. 그 고향을 잃어버리면, 말은 점차 어려워지고, 제 꼴을 지키지도 못합니다. 이런 일들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결국 그 말의 주인인 백성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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