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온깍지활쏘기학교 교두

온깍지궁사회가 막 출범한 2001년의 일입니다. 이석희(부산 사직정) 행수가 납궁례라는 말을 합니다. 즉 윤준혁(부산 수영정) 고문이 납궁례라는 풍속이 옛날에 있었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세히 알아봐달라고 했는데, 해방 전에 천양정에서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분이 납궁례를 한 적이 있고, 한국 전쟁 후에도 서울 서호정에서 이우봉이라는 분이 남궁례를 한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뿐만이 아니고, 전 세계 무술인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일입니다.

결국 그 해에 열린 ‘온깍지 세미나’에 윤준혁 고문을 초청하여, 자세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납궁례는, 활량이 나이가 들어 활을 더 쏠 수 없게 되면 자신의 궁시를 집궁한 활터에 반납하고 조용히 활터를 떠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은퇴식에 해당합니다. 무술의 전통이 오랜 중국이나 일본에도 없고 오직 우리나라에만 있는 풍속입니다.(‘활쏘기의 어제와 오늘’)

이게 얼마나 특별하고 멋있는 풍속이냐면, 무협지에 이와 비슷한 풍속이 있습니다. 금분세수(金盆洗手)가 그것입니다. 무협지 속의 강호무림이란 피비린내가 나는 싸움터입니다. 그곳에 몸 담은 사람은 남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죠. 자연히 은혜와 원한이 쌓이는 구조입니다.

보복을 당할 염려가 항상 있죠. 그런데 그런 곳에 몸담은 사람이 나이 들어 은퇴하려면 어떡해야 할까요? 은퇴한 사람이라고 해서 보복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협지에서는 그런 사람을 보호하는 방법으로 은퇴식을 만든 것입니다.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금분세수를 한다고 강호에 알리면 사람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모입니다.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선언을 합니다. 은원을 정리한다는 의미로 금대야에 손을 씻는 것인데, 손을 씻기 전에 원한이 있는 사람은 이 자리에서 말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원수를 갚을 기회를 주는 것이죠.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해결하고, 없으면 금으로 된 대야에 손을 씻고 무림을 떠납니다.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이 되려고 했는지 이석희 행수로부터 또 연락이 왔습니다. 온깍지궁사회와 특별히 인연을 맺은 김향촌 여무사님이 병원에 들렀다가 갑자기 중환을 확인한 것입니다. 이때 이 행수가 조심스럽게 납궁례 얘기를 했는데, 김 여무사님이 그 취지가 고맙다며 제안을 선뜻 받아 들이신 것입니다. 2001년 8월 26일에 집궁처인 사천 관덕정에서 온깍지궁사회와 공동 주관으로 김향촌 여무사의 납궁례가 엄숙하게 거행되었습니다. 이 뜻깊은 행사를 구경하려고 전국에서 한량들이 찾아왔습니다. 납궁례 뒤 1년만에 김 여무사님은 입산하셨습니다.

납궁례는 참 보기 드문 행사입니다. 납궁례를 행하려면 내가 더는 활을 쏘지 못한다는 판단이 서야 하는데, 난치병에 걸린 사람이 아니고는 그런 경우가 없어서, 대부분 오늘 낼 오늘 낼 하다가 결국 결심을 못 하고 갑작스레 입산하는 까닭에 성사되기 힘들다고 합니다. 하하하. 그런 점에서 김향촌 여무사님의 납궁례는 정말 많은 사람에게 멋진 선례를 보인 것이었습니다.(‘한국 활의 천년 꿈, 온깍지궁사회’)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