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상강을 앞둔 들녘 풍경이 확연히 달라졌다. 노랗게 익어가는 벼 이삭은 논배미마다 노란 지단을 가득 부쳐 놓았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윤동주 님의 시와 자연적인 색채에 감동하며 깊은 쉼을 가져본다.

내게는 가을 들녘이 가장 핫한 여행지이다. 산과 들에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도 남음이 있다.

가을의 한복판 들녘에 서서 로보(Lobo)의 ‘I'd Love You To Want Me’ 곡을 듣는다. 이 계절에는 은은하고 고요한 지고이네르 바이젠 과 같은 클래식 감성 음악이 더 어울릴 법도 하지만 나는 이 음악이 좋다. 이 노래 만큼 날 흔드는 노래는 없었다. 70년대 팝송 팬들을 사로잡은 추억의 이 곡은 시공을 넘어 사라질 만도 하건만 가슴 절절히 파고드는 미묘함 감성은 마력처럼 빠져들게 한다. 미끄러지듯 이어지는 선율은 초콜릿처럼 달콤하고 Lobo의 감미로운 보이스, 포크의 환상적 리듬은 갈빛 우수를 덧입혀 전신을 감싸 안는다.

들녘의 바람과 파란 하늘, 전곡에 천국의 주파수가 섞여 있는 듯한 음률. 이러한 요소들은 훌륭한 시너지로 몸과 마음을 빛나게 해 준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게 하는 이 음악, 누군가의 아픔을 위로해 주는 음악이다.

내 마음의 문을 열어 무한리필로 반복 재생되는 하는 이 노래, 수많은 팝송 중에 유일하게 끝까지 따라 부를 수 있는 곡이다.

언젠가 남도 여행 중 선상에서 통기타를 치며 이 음악을 연주하던 가수가 떠오른다.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무명의 남자가수 노래는 여행의 감성을 더했다. 그날, 사회에서 만나 연이 이어온 그녀가 고백했다. “나는 고아였어.” 이 말을 듣고 얼마 동안 공허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나이 사십이 넘어 고아 아닌 사람이 얼마나 있으랴 만은 처음부터 그녀가 고아였다는 말은 충격이었다. 그녀가 언니와 동생 사이에서 다른 핏줄로 살아온 것에 대한 현실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그래서 그리 어딘지 모르는 쓸쓸함이 보였던 것일까,

생각할수록 자꾸 목이 메워 오던 그 날밤, 잠자던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듯한 이 음악은 그녀와 나를 한 꺼풀식 벗겨냈다.

그 후로도 마음이 삭막해 질 무렵이면 홀연히 찾아드는 이 노래로 감성을 촉촉하게 채워주었다.

여행의 설렘이나 우울함도 쓸쓸함도 모두 포용하는 이 노래, 누굴 향해 뜨거움이 차오를 때도, 마지막 이별까지도 해갈시켜주는 노래이다.

시월의 주말 오후, 엄마가 좋아하는 음악을 위해 아들이 들녘에 섰다. 석양이 지는 기찻길을 배경으로 이 곡을 연주했다. 철길이 이어지는 곡선을 따라 연주가 매끄럽게 퍼져나간다. 선상이 아닌 철길에서의 공연은 나름대로 색다른 연출로 유튜브를 뜨겁게 달구게 될 것이다. 아들이 기타 컴퍼니를 운영하는 덕분에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곧 있으면 나뭇잎도 들풀도 발갛게 물들일 것이다.

가을은 점점 많은 것들을 건져내고 있다. 그리고 점점 내 마음을 앗아간다.

가을이 아름다운 것은 각자의 자리에서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이름으로 열매를 맺기 때문이리라.

가을이 더 아름다운 것은 떠나야 할 시간을 알기 때문에 마지막 치장을 하는 여인 같기 때문이리라.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