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연구원 연구위원

탄소중립은 이제 세계적 화두이자 인류의 숙제가 되었다.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의 탄소중립 선언 후 우리의 삶 속으로 성큼 들어왔다. 탄소중립(carbon neutrality), 넷-제로(net-zero), 탄소제로 등으로 불리며 다소 어려운 말 같지만, 결국 기후변화에 영향을 주는 인간의 행동을 고치자는 것이다.

전기나 석유 등 에너지를 덜 쓰고, 자가용 대신 대중교통이나 자전거, 도보를 이용한 출퇴근 하기, 일회용품 덜 사용하기 등의 환경보호 운동과 흡사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일반인들에게 기존의 환경보호는 내 삶과 동떨어진 듯 느껴졌고 선택의 문제였으나. 탄소중립은 왠지 꼭 해야만 하는 필수적 현안으로 인식하는 성향이 더 크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 시대 최대의 숙제로 떠오른 탄소중립은, 그러나 만만치 않은 목표이다. 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운 이유가 우리나라의 경제구조, 온실가스 배출량(세계 11위), 이산화탄소 배출량(세계 7위), 석탄발전에 의존하는 전력의 비중(40.8%), 재생가능에너지 비중(OECD 국가 중 최하위) 때문만은 아니다. 이런 국가적 지표보다는 우리의 인식과 문화, 삶의 습관이 어쩌면 더 어려운 숙제일지도 모른다. 환경정책을 연구하는 필자 자신도 사실 탄소중립적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탄소중립은 거대한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는 대 전환에 가깝다.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한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부터 시작하는 대단히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너무 거창한 것 같지만, 지금의 경제구조에서 경제적 이익의 감소를 수용하는(또는 경제구조에 환경오염 비용을 온전히 포함하는) 사회로 옮겨 가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탄소중립을 실현해도 늦었다고 할 수 있는데, 30년 뒤에 실현하겠다고 하니 그 가능성은 더욱 떨어진다. 국가나 세계적 상황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삶을 봐도 그렇다. 그렇다면, 탄소중립 사회,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도심에는 자동차로 진입하지 못하고 오직 자전거와 도보만 가능한 도시구조, 일회용품의 생산을 절반으로 줄이는 산업구조, 오후 9시 이후에는 모든 상가의 문을 닫고 농·축산물은 자전거 생활권 이내에서만 구입하는 유통정책, 육식은 1인당 월 1회로 제한하고 초과하는 양은 10배의 가격을 주고 구매해야 하는 농식품정책, 재택근무를 원칙으로 하되 만나서 회의하는 경우 기관장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근로정책, 20리터 쓰레기 종량제 봉투 한장의 가격이 1만원인 폐기물정책.

어쩌면 이런 비현실적일 것 같은 사회로 바뀌어야 비로소 탄소중립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런 사회를 수용 가능한지 스스로 질문해보기도 하지만, 자신있게 대답하기 어렵다.

30년 전, 대학 선배들의 졸업작품 중 환경보호를 주제로 한 작품의 제목이 ‘내일이면 늦으리’였다. 그때는 기후변화에 대한 국제협약(리우환경협약)이 체결된 직후이기도 했다. 시의적절하게 제목을 잘 지었다고 생각했는데, 30년간의 사회변화 과정을 경험해 보니 지나치게 앞선(?) 구호였다. 30년이 지난 지금에서 우리 사회는 ‘내일이면 늦으리’를 외치고 있다. 다시 또 30년을 지켜봐야 할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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