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오랜만에 집에 들른 아들과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대화는 별로 없었다. 나는 텔레비전을 보고 아들은 게임을 하는지 핸드폰에 빠져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아들이 묻는다. ‘왜 내가 어렸을 때 게임에 빠져있어도 야단치거나 말리지 않았어요?’

아들의 질문을 받고 나니 어릴 때 일들이 뇌리를 스친다.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 내가 살던 동네에는 서점이 딱 하나 있었다. 서점이라고는 하지만 만화책을 빌려주는 게 전부인 만화 가게였다.

만화책 중에서 특히 좋아했던 만화는 ‘동물전쟁’이라는 만화였다. ‘케리’, ‘제니’, ‘베스’, ‘검둥이’와 ‘반둥이’ 같은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들을 의인화하여  연합국과 침략국의 전쟁을 그린 작품이었다. 나는 ‘동물전쟁’을 참 열심히 읽고 또 읽었다.

멍멍군의 ‘진돗개’ 사령관과 ‘케리’ 연대장, 그리고 적군부대인 흑고양이, 늑대, 흑점이 상사들이 벌이는 다채로운 이야기 전개에  손에 땀을 쥐고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만화를 보고 온 날이면 낮에 보았던 만화를 흉내 내어 열심히 그렸다. 집에서도 그리고, 학교에서도 그렸다. 그리고는 그렇게 그린 소중한 내 만화를 친구들에게 선물하곤 했는데 친구들은 좋아했던 것 같다. 친구들도 역시 그 만화책을 많이 읽었던가 보다. 그러나 만화를 마음 놓고 보던 평화의 날은 계속되지 않았다. 만화에 빠져 살던 어느 날, 자식을 사랑하셨지만 지극히 엄격하시기도 하셨던 아버지께 내가 만화에 빠져있다는 정보가 들어가고 말았다. 그 시절 만해도 ‘만화는 나쁘다’라는 등식이 어른들에게는 있으셨던 것 같다. 유교적인 전통에 젖으신 아버지는 장남인 내가 저질 만화 같은 것에 빠져 사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몇 번의 경고가 있었다. 하지만 만화 ‘동물전쟁’의 유혹은 그 무서운 아버지의 경고도 결코 막지 못했다.

결국 아버지와 저녁밥상을 같이 하다가, 아버지의 충신인 동생의 신고로 아버지의 분노가 대폭발하기에 이르렀다. 내 볼에 아버지의 커다란 손이 날아오기를 반복하더니 급기야는 밥사발이 날아와 머리를 스쳤다…… 정신이 없었다. 억울했다. 나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공부도 열심히 했고, 학교에서는 반장이었고, 글짓기도 잘했는데…… 나는 아버지께 다시는 만화 가게에 가지 않겠다고 맹세를 거듭한 끝에야 아버지의 분노로부터 간신히 놓여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생과의 머리싸움에서는 내가 한수 위였다. 나의 몰래 만화보기는 6학년 때까지 이어졌다.

내가 만화에서 손을 뗀 건 중학교 입학시험을 보고나서였다. 우연히 들른 만화 가게에서 주인아저씨가 엉뚱한 질문을 하셨다. ‘야, 너 중학교 입학시험은 합격했냐?’ 그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나는 그 어렵다는 명문중학교에 합격했는데?’ 친구들의 증언을 듣고서야 주인아저씨는 놀라는 눈치였다. 만화에만 빠져 살고 공부는 안하는 줄 알았던 악동이 그 어려운 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던 모양이다. 그리고는 아주 큰맘 먹으셨는지 엄청난 제안을 하셨다. ‘너 오늘부터 우리 집 만화는 공짜로 보여줄게!’ 그 말씀을 듣고 나는 다시는 그 가게에 얼씬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 만화가 최경 작가의 작품으로 60년부터 80년대까지 154권이나 시리즈로 발간되어 역사에 남는 불후의 명작임을 안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아들의 질문에 대답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오늘 모처럼 하늘이 참 맑다. 볼 따귀에 이어졌던 아버지의 손길이 많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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