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언어는 그 사람의 인격이나 그 사회의 문화를 대변한다. 문화가 발달할수록 언어는 섬세하고 다양하다. 특히 우리 한국어는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는 다양한 형용사를 갖고 있다. 그만큼 우리 민족의 정서가 풍부하다는 뜻일 게다. 또한 한국어는 호칭어가 유난히 발달했다.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때였다. 초급 학습자들이라서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설명을 해야 할 때가 많았다.

가족 관계는 家系圖를 보여주면서 설명을 해야 했다. 우리가 당연하게 쓰던 호칭에서 브레이크가 걸렸다. 가족 구성원 각자의 이름 석 자가 있는데도 호칭어와 지칭어를 함께 배워야 하는 외국인 학생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복잡하고 어렵다는 것이다.

시누이는 시누이라 부르지 못하고 고모, 형님, 누님으로, 누가 부르느냐에 따라 호칭이 달라진다.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은 남편의 여자 형제 한 사람을 두고 시누이, 누님, 형님, 고모라는 단어를 모두 익혀야 한다. 시누이의 진짜 이름은 어디로 갔는가. 이모는 어머니의 여자 형제 말고도 식당에 가면 수두룩하다. 오빠도 마찬가지다. 남자 형제도 오빠요, 남자친구도 오빠다. 남편도 오빠고 친한 선배도 오빠가 된다. 우리는 왜 당당히 그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가. 이 혼란스러운 호칭에 대해 생각해볼 때가 아닌가 싶다.

우리는 흔히 이름보다 직함을 넣어서 불러주는 것을 예의라고 생각한다. 물론 같은 공동체 안에서야 당연한 일이지만 한 번 국장은 퇴사를 해도 국장이요 사장 아닌 사장님은 주변에 널려있다. 호칭어를 잘못 썼다가는 왠지 불손한 느낌이 드는 것은 사람보다 직위를 중요시하는 우리의 수직적 정서 때문이리라.

호칭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일러준다. 호칭만 들어도 누가 손위이고 누가 아래인지 알 수 있다. 서열을 세울 수 없는 관계라 하더라도 굳이 자신을 낮추는 모습에서 겸손이라는 미덕을 보이곤 한다. 한 번도 함께 일한 적 없는 사람에게 자진해서 사원이 되어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겸손은 호칭이나 말로 남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핵가족화되면서 친인척 관계도 간편해지는 추세다. 사용 빈도가 점점 사라지는 호칭도 있다. 당숙이나 질부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아는 젊은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과거에는 가까웠던 친척도 요즘은 먼 이웃이 되어간다. 인정의 끈이 점점 짧아지는 것 같아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이제는 현실적으로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좀 더 간소하고 편리한 호칭이 아쉽다.

한국어는 이제 우리만의 언어가 아니라 세계 속 언어가 되었다. 한국어를 배우려는 지구촌 많은 사람이 좀 더 쉽게 다가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언어 습관을 단시일에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복잡한 호칭어나 지칭어를 단순화하여 ‘OOO사장님’을 ‘OOO님’이라고 불러도 불편해하지 않는 사장님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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