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사람은 분수를 알아야 한다. 능력 밖의 일을 해 보려는 것이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박수를 보낼 일이지만, 능력도 없으면서 능력이 있는 것처럼 꾸미는 것은 분수를 넘는 일이다.

윤석열 후보는 7월 17일 광주에서 이한열 열사 묘소를 참배하면서 “1987년 당시 대학원생으로 연세대 옆에 살고 있었다.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는 장면은 목격하지 못했지만 전후상황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그로부터 열흘 지난 7월 27일 부산 민주공원을 찾아,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고 쓰러지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진을 담은 조형물 앞에서, 옆에 있던 장제원 의원이 ‘이한열 열사’라고 안내하는데도 불구하고, “이건 부마항쟁인가요?”라고 물었다. 부마항쟁은 1979년 10월의 일이다. 이한열 열사의 1987년 6월항쟁과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거리가 있다.

윤석열의 위 언행을 보면서, 그가 열흘 전 광주에서 이한열 열사를 떠올리며 한 말과 행동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윤석열이 1980년대와 그 이후 시기를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잘 알 수 있다. 그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아주 먼 사람이다.

윤석열은 교수를 하는 부모 밑에서 사립 초등학교를 다니는 등 어려움 없이 자랐다. 1979년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고, 부동시로 병역 면제를 받았다. 1979년부터 1987년 6월항쟁까지 서울대학교 언저리에 머물면서 학교에 다니고 사법시험 공부를 했다. 수많은 학생이 전두환 정권에 5·18 진상규명 등을 요구하면서 몸을 던져 싸울 때, 윤석열이 돌 한 번 던져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 그가 그의 처지(분수)를 모르고, 광주, 대구, 부산으로 다니면서 5·18, 4·19, 부마항쟁을 말하고 있다. 민주화운동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뒤늦게나마 그 역사에 공감하면서 뜻을 이어가는 것도 좋은 일이다. 문제는 진실성이다. 그가 정말로 진실성이 있다면, 1980년대 민주화운동 때 자신이 무엇을 하였는지 밝히고, 거기에 부족함이 있었다면 반성하는 것이 먼저다. 그러나 그는 오로지 정치적 목적을 위해 광주, 대구, 부산으로 다니며 자기 몸과 마음에 맞지도 않는 민주화운동을 떠들고 있다.

윤석열은 얼마 전 국민의힘에 입당했다. 국민의힘은 그가 금과옥조처럼 말하고 다닌 4·19, 5·18, 부마 민주화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게 만든 독재정권들을 잇는 정당이다. 말과 행동이 너무나도 어긋난다.

그는 7월 19일 매일경제와 인터뷰에서 “부정식품이라는 것은 없는 사람은 그 아래도 선택할 수 있게 싸게 먹을 수 있게 해줘야 된다”고도 했다. 민주주의, 평등, 복지 등 헌법가치에 대한 깨달음이 없다 보니, 망언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에 대해 그는 정치를 처음 하고 설명을 자세히 하다 보니 생긴 오해라고 하나, 이것은 오해 차원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가치관의 문제다.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분수’를 모르면 ‘푼수’다. 눈 밝은 이들에게, 그는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사람들은 검사는 다 그 같은 줄 안다. 그는 그가 충성한다는 검찰마저 욕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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