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억울하다. 안경 너머 자글자글 늘어진 잔주름이 묻지도 않는 나이를 일러준다. 가뜩이나 예쁘지도 않아 웃는 모습밖에 내세울 게 없는 얼굴인데 그걸 다 가리고 눈만 빠꼼이 내놓으란다. 내 눈은 크지도 않고 속눈썹도 짧아 볼품이 없다. 그러니 왜 억울하지 않겠는가.

여름 방학식을 끝내고 학원에 온 몇몇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깜작 이벤트에 아이들은 놀란 눈으로 아이스크림을 받아들었다. 마스크를 잠깐 내린 사이로 살짝살짝 보이는 얼굴이 낯설다. 만난 지 6개월이나 되었건만 이제껏 내가 보아왔던 아이들이 아니다. 턱살이 통통한 아이, 입술이 얇은 아이, 코가 큰 아이……. 몇 개월을 함께 지냈는데도 처음 보는 얼굴이다.

“현빈이 얼굴이 이랬었어? 지우도? 민영이도?”

아이들도 나도 한바탕 웃었다. 여태껏 아이들을 반쪽만 보아왔다는 생각이 들자 뭔가 모를 미안함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마스크에 가려졌던 희뽀얀 얼굴들이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예뻐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지도하는 아이들에 대해 꿰뚫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문제를 푸는 과정이나 질문하는 내용, 발표하는 요령을 지켜보면서 아이마다 어디를 보완해야 하는지 눈에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오랜 경험이 만들어준 안목이다.

그렇다고 아이를 다 안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내 눈에 비친 모습이 전부라고 착각한 것은 크나큰 오류가 아니었을까. 보이는 얼굴만 보고 아이의 전체 모습을 그려왔던 것처럼 한 가지 사실로 모든 것을 파악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임을 옆에서 지켜본 터이다.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반주로 술을 한 잔 마신 직원이 있었다. 조심해야 하는데 피할 수 없는 자리였단다. 긴가민가한 술 냄새에 상사는 사실을 추궁했고 그는 부인했다. 갑작스런 물음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확신을 갖고 재차 물어도 그는 부인으로 일관했다. 처음부터 아니라고 잡아뗐으니 곧바로 번복하기도 민망했을 것이다. 그 후로 상사는 그를 신뢰할 수 없다며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라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감추지 못할 만큼 순진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맡은 일에도 전혀 미흡함이 없으며 꾀를 부릴 줄도 모르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오히려 순수한 영혼을 가진 젊은 가장이었다. 결국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도 했지만 이미 타이밍을 놓친 후였다.

마스크 밖으로 드러나는 얼굴과 마스크에 가려진 얼굴이 다르듯이 그 사람의 인품도 한 가지 면만 보고 쉽사리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말이다. 사람은 일관성도 있고 이중성도 있으며 다양성도 갖고 있다. 누구는 어떤 사람이라고 과연 단정 지을 수 있을까. 그래서 노자는 名可名 非常名이라고 했는가.

마스크로 가린 반쪽 얼굴로 나를 모두 보여줄 수는 없다. 못생긴 내 두 눈이 나의 전부라고 말하긴 억울하다. 보이지 않는 이면을 함께 볼 줄 아는 심안이 필요하다. 마스크 시대에는 더욱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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