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청주민예총 사무국장

[충청매일] 우연한 기회에 Literacy라는 생소한 단어를 접하게 되었다. 리터러시의 어원이나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이 단어를 아는 이는 많지 않아 보인다. 리터러시는 ‘다양한 맥락과 연관된 인쇄 및 필기 자료를 활용하여 정보를 찾아내고, 이해하고, 해석하고, 만들어내고, 소통하고, 계산하는 능력(유네스코)’ 또는 ‘일상생활, 가정, 직장, 커뮤니티에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고 지식과 잠재력을 발전시키는 능력(OECD)’이라 정의한다.

정의를 봐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우리는 문해력, 독해력, 이해력 등의 단어가 친숙하다. 텍스트를 해석하고 올바른 정답을 찾아내는 능력이나,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고 적절한 답을 하는 경우 등이 아닐까 싶다.

활자화 된 매체에 의존하던 시대에는 문해력이나 독해력이 중요했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글을 읽는 것이었다. 책이나 신문 등 활자화된 매체를 통해 정보를 얻고 이해하고 판단하고 이를 바탕으로 글을 쓴다. 글이라고 하는 최종 매체는 말처럼 흘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어서 글을 쓰는 이는 아주 신중하고 조심스럽고 여러 번의 고뇌와 퇴고 과정을 거친다. 쓰는 행위는 한 치의 실수도 용납지 않으므로 아무나 쓸 수 있는 행위가 아니었다.

요즘 정보를 얻는 매체는 글이 아닌 영상이다. 모든 정보는 유튜브를 통한 영상물이 대부분이다. 세상의 모든 지식과 정보가 검색 하나로 해결된다. 또한, 커뮤니티의 글은 고뇌와 퇴고 과정없이 즉흥적이고 언제나 수정, 삭제가 가능하다. 쓰는 행위 역시 특정인의 것이 아닌 누구나의 행위가 되었다.

종종 댓글을 통한 언어폭력이나 무분별한 허위 사실 유포, 자극적이고 편향적인 기사로 인한 사회 문제 야기 등의 뉴스를 접하게 된다. 순간적으로 쓰고 지우는 일이 가능해진 세상이므로 어떠한 검증도 없이 말과 글이 공중에 떠다닌다. 정보의 홍수와 무분별한 생산의 문제로 인해 세계는 리터러시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제도화하고 있다.

리터러시란 결국 세상을 보고 올바르게 이해하고 목표를 달성하는 행위 전반에 해당한다. 글을 쓰는 이와 읽는 이의 관계는 매체 종류를 떠나서 중요하다. 글을 쓰기 위해 또는 영상을 제작하기 위해 우리는 정보를 얻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정보를 생산한다. 그러므로 어떤 정보를 얻어 어떻게 이해하고 무슨 정보를 만드는 것인가가 핵심이다.

결국, 쓰는 행위이다. 시인이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보고, 느끼는 행위가 필요하며, 보고 느낀 정보를 이해하고, 해석하고 이를 토대로 쓰는 행위로 이어진다. 시라고 하는 특수한 형식과 장치를 통해 독자와 소통하는 것이다.

시 쓰는 일이 쉽지 않은 이유는 시가 지닌 특수성 때문이 아니라 굳이 시의 형식을 빌려 말하고자 하는 시인의 마음이 좀처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는 쉽게 쓰이지 않지만, 시만큼 양심적인 글도 없다.

리터러시 교육을 위해 많은 방법이 연구되고 있지만, 시적 감수성을 이해하고 올바르게 시를 읽을 수 있다면, 많은 고민이 해결되지 않겠는가. 시험을 위해 배우는 시가 아니라 시인과 화자와 독자의 간극을 읽어낼 때의 짜릿함을 누구든 느낄 수 있다면, 쓰는 행위의 존엄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시, 글쓰기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은 일명 ’꼰대‘임을 자처하는 일이지만, 쓰는 행위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시간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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