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온깍지활쏘기학교 교두

[충청매일] 일제강점기 때 친일 작품을 남겨 끝끝내 비난을 면치 못하는 미술가들이 꽤 많습니다. 그런 조각가 중에 윤효중이라는 분이 있는데, ‘현명(弦鳴)’이라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다른 게 아니고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무사가 잘록한 허리에 화살을 차고 각궁을 기역 자로 구부러지게 당긴 모습을 나무로 조각한 것입니다. 이 작품을 보고 활을 쏘는 저는 윤효중 화백의 실력이 정말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작가는 대상을 보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않고 강조할 부분을 강조하게 되는데, 내용을 아는 사람이 강조하는 것과 모르고 강조하는 것이 다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리얼리즘 계열로 대상 묘사에 충실한 작품인데, 그 꼼꼼함과 과감함이 활 쏘는 여무사의 아름다운 곡선과 활이라는 강한 힘의 조화를 아주 잘 표현했습니다.

이와 같이 활 쏘는 여자를 활터에서는 여무사라고 물렀습니다. 무사 앞에 ‘여’를 붙인 것이죠. 활터에서 활 쏘는 사람은 보통 한량이라고 불렀는데, 여자는 무사라고 부른 것입니다. 남자도 무사라고 부르기는 했습니다만, ‘접장’이나 ‘한량’에 떠밀려서 무사라고 잘 안 부른 것입니다. 그 자취가 여무사라는 말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 겨레의 활쏘기는 여자의 곡선미와 아주 잘 아울리는 구조를 지녔습니다. 활채가 짧으므로 곡선이 과감하고, 그것을 당긴 여자들의 곡선미와 어울리면 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예술가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윤호중의 작품 ‘현명’도 그런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조선 시대는 남자 중심의 구조여서 여자들이 당당히 남자들과 어울리기 힘들었는데, 그것이 유일하게 예외로 인정된 것이 바로 활터였습니다. 활터에서는 여무사라고 불러서 특별대접을 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전조선 궁술대회를 할 때는 공설운동장에서 구경꾼들에게 입장료를 받았는데, ‘한성권번’과 ‘대정권번’의 기생들이 편을 나누어 활쏘기 시합을 하기도 했고, 이로 인해 생긴 이익금을 가뭄으로 고난을 겪는 만주의 우리 동포들을 지원하여 언론으로부터 찬사를 받기도 합니다.

당시 기생들이 활을 쏜 것은, 경제력 때문입니다. 활이나 화살을 구하려면 제법 큰돈이 드는데, 그런 경제력을 갖춘 사람은 기생이 거의 유일했고, 그래서 기생들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데 당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존재감이 활터에서도 남자들과 당당히 어울려 활을 쏘는 상황을 만든 것입니다. 활터에서는 지금도 여자라고 해서 특별한 대접을 하지 않습니다. 과녁 거리도 같고 장비도 똑같습니다. 남자와 똑같이 대접하고 똑같이 활동합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먼저 남녀평등이 실현된 곳이 활터입니다. 물론 그 평등의 수준이나 차원이 지금의 평등이라는 개념과는 같지 않겠지만, 남존여비 사회에서 남자들과 당당히 어울릴 수 있었던 여자들이기에 ‘여무사’라는 활터 안의 독특한 이름으로 불린 것입니다.(‘활쏘기의 어제와 오늘’)

얼마 전에 ‘전국여무사회’가 ‘전국여궁사회’로 발족했습니다. 여무사가 여궁사로 바뀐 것을 어떻게 봐야 할지 판단이 선뜻 서지 않습니다. ‘여무사’는 지난날 여성들의 자부심이 깃든 말입니다. ‘여궁사’는 어떤 의미로도 그런 상황을 담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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