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시인

한글이 전 세계의 알파벳이 될 뻔한 사건이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이 의외로 안 알려진 듯합니다. 만약에 오늘날 전 세계인들이 한글로 자기네 소리를 적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얼마나 기가 찬 일일까요? 우리에게 다가온 두 번의 기회를 잘 살렸다면,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사건에 대해서 살펴보면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암시하는 바가 있습니다.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명청교체기입니다. 청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나라로, 여진족은 한반도의 북쪽인 만주에서 반농반목의 상태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누루하치라는 뛰어난 지도자를 낳으면서 명나라가 시들해질 무렵에 만리장성을 넘어서 중국으로 들어가죠. 이 당시에 이들은 제 글자를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사실 그 전에 조선과 중국 양쪽에 끼어 살면서 양쪽으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훈민정음이 생기고 나서, 잠시만 기다리면 저절로 압록강과 두만강 건너로 흘러가게 된 형국을 맞이하죠. 그런데 조선 내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과천의 벽서 사건을 계기로 연산군이 언문을 쓰지 못하게 하고 훈민정음과 관련된 자료를 불태워 버리죠. 이후 훈민정음은 세종 때 사대부들도 쓰던 문자에서 노비나 아녀자들이 쓰는 피지배층의 문자로 전락합니다. 백범 김구 선생도 한글을 자신의 부인한테서 배웁니다.

만약에 이때 훈민정음이 여전히 사대부도 쓰는 문자로 자리 잡았다면 그 간편한 글자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는 일은 시간문제이고, 그렇다면 여진족이 한글을 배워서 자신들의 의사전달 수단으로 썼다면 지금 어땠을지 생각해보는 것은, 가슴마저 쿵쾅거리게 합니다. 중국 전체가 아마도 훈민정음을 쓰지 않았을까요?

이것이 한글이 세계화할 기회를 놓친 첫 번째 사건입니다. 두 번째 사건은 극히 최근에 일어났습니다.

중국 대륙이 공산화된 뒤에 중국 지도부가 걱정한 것이 한자라는 복잡한 문자체계였습니다. 하다 못해 타자기를 만들려고 해도 기본 부수가 400자 가까이 되니, 이것을 타자기의 한 공간에다가 배치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지경입니다. 그래서 좀 더 단순화시키자는 고민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실제로 부주석 주은래의 주도로 몇 년간 연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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