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솔문학작가회
수필가

[충청매일] 녹음이 검푸르게 우거진 6월이 오면 우리국민 누구나 슬프게 생각하는 것은 6·25사변, 동족상전의 처참한 비극을 잊을 수가 없다. 이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로 통일을 이루지 못한 조국의 뼈아픈 현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지는 듯 아프다,

1950년. 지금부터 71년 전 6월 25일 새벽 4시! 소재탱크를 앞세우고 38선 전역에서 북한군이 불법 남침을 하여 일어난 전쟁이다. 이 엄연한 사실을 71년을 두고 끊임없이 북침이라느니 남침 유도전 이라느니 온갖 거짓 선전선동을 하는 것을 보면 울분이 터져 나온다.

당시의 군사력은 북한이 우위에 있었다, 소련의 지원을 받아 소재탱크 240대, 전투기170대, 병력 20만이 넘었지만 한국은 탱크, 전투기는 하나도 없었고 훈련기 20대, 병력 10만에 불과했다. 주한 미군은 전쟁 도발을 우려해 무기는 전혀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1947년 6월에 어찌된 일인지 우리 남한의 버팀목인 주한 미군마저 철수를 했다. 1950년 1월 12일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에 의해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이 선포 되었다. 애치슨 라인이란 동북아시아의 극동 방위선인데 일본 오키나와를 거처 대만,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이라 한다. 이 선 안에 한국이 빠졌다. 그래서 한국은 공격을 당해도 미국이 오지 않을 것이라 의심했다. 모든 국제 정세가 유리하다고 판단한 김일성은 빠르게 남침하면 수일 내로 남한을 공산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 소련의 스탈린의 허락을 받아낸 사실이 소련 기밀문서에서 최근 밝혀지고 있다.

더욱 놀라운 일은 1950년 6월 24일 자정 국군은 그동안 유지해오던 비상계엄령마저 해제했다. 군 장병들은 농촌 모내기 일손을 도와라 지시했다. 주말 휴일로 군 병력은 대부분 외출한 상태 이었다. 남침의 기회만을 노리던 북한은 남한의 허술한 경계를 놓치지 않았다.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폭풍’이라는 공격 명령과 함께 38선 전역에서 기습 남침을 했다. 이러고서도 북침이라고 거짓 선동하는 공산집단이다. 그날 북한의 남침은 소련의 지휘 하에 치밀하고 계획적인 침략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날 우리 국군은 무방비 상태로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러나 용감하게 싸웠다. 침투하는 적의 탱크에 뛰어올라 수류탄을 던져 폭파하며 맨주먹 붉은 피로 싸웠다. 그날 북한의 남침으로 UN 안보리가 즉시 소집되고 북한 남침은 부당한 침략으로 규정하고 즉시 38선 이북으로 철수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위기의 한국을 돕자고 16개국이 참전 UN군과 북한군의 전쟁으로 비화되고 중공군의 가담으로 전쟁의 참화는 더 길어지고 더 처참했다. 지금도 남북은 휴전 상태에 있다. 남북 분단 71년! 이 엄청난 비극의 출발점은 그날 북한군의 기습 남침에 있다. 그런데도 최근 고교생의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65%가 6·25전쟁은 북침이라 답했다는 충격적인 발표가 있었다. 어떻게 이 엄연한 사실을 북침이라 가르칠 수가 있는가. 아무리 정권이 바뀌고 이념이 역사를 우롱한다해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6·25가 발생한 그날의 진실이다. 6·25를 경험하지 못한 전후세대 에게 올바른 역사인식이 시급하다는 점에 있다. 아~ 6·25의 남침! 그 날을,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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