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충청매일] 나는 음지쪽 잣나무에 기대어 무릎 쏴 자세를 취했다. 그쪽 음지에 그림자 하나가 넘어오는 것이 보인다. 거기에는 개인 호가 있다. 북쪽을 향해 파놓은 아군의 진지다. 나는 칼빈총을 조준했다. 이미 넘어온 놈은 보이지 않고 이어 넘어오는 놈을 향해서 방아쇠를 당겼다. 앞으로 고꾸라졌다. 명중이다. 그때 먼저 넘어온 놈이 봉우리 쪽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또 다시 당겼다. 그놈도 그 자리에 쓰러졌다. 불과 50여 미터밖에 안 되니 안 맞을 수가 있나. 나는 쾌재를 불렀다.(중략) 이것이 전쟁인가, 불행한 민족의 앞날과 나도 앞으로의 전투에 전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는 그때 모습을 생각하니 씁쓸한 감정에 휩싸였다.

아버지의 자서전 일부이다. 후보생으로 지원하여 임관하기도 전에 6·25전쟁을 맞으셨다. 삽시간에 서울이 함락되고 후퇴하던 중에 경북 신령 전투에서의 첫 경험을 술회하신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에 살았다.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무시를 당하면서도 일인화(日人化) 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는 속울음을 삼키며 조선을 그리워하셨다. 해방이 되자 꿈에 그리던 조선땅을 밟았지만 조선말도 잘하지 못했다. 학연도 지연도 없었다. 사고무친에다 장남으로서의 어깨가 무거웠던 아버지는 조선 경비대에 입대하셨다. 당당한 조선의 남아로 마음과 육신의 본적을 찾았다며 불굴의 의지를 불태웠다.

내가 태어날 즈음 아버지는 전쟁 중에 얻은 지병 악화로 중령 진급을 코앞에 두고 제대하셨다. 틈만 나면 딸들을 앉혀놓고 전쟁 때의 무용담을 늘어놓으셨지만 우리는 콧등으로 들어넘기기 일쑤였다. 슬슬 아버지를 피하는 때도 있었다. 더 어렸을 때는 아예 훈장을 가지고 놀다가 잃어버린 적도 있다.

아버지께서 가끔 술을 드시고 오시면 우리는 모두 군가를 불러야 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동요 부르듯 했다.

몇 해 전 푸른 하늘이 쨍글쨍글한 유월에 아버지는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몰랐던 우리는 자서전을 읽고 나서야 묻혀버린 영광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일본에서 받은 서러움에 항거라도 하듯 뼛속까지 군인이셨던 아버지. 포격을 맞아 살점이 찢겨나가고 붉은 피가 솟구치는 전우를 수없이 보아왔다.

압록강을 코앞에 두고 후퇴하던 중 인민군 병사와 맞닥뜨렸을 때의 긴장감이란. 포위망을 뚫고 몇 안 남은 부대원을 이끌고 외로운 사투를 벌인 용감한 청년 국군이었다.

생사의 고비를 숱하게 넘겼어도 아무도 알아주는 가족이 없었으니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일찍 아들을 두셨더라면 조금은 나았을까. 장남인 동생이 아버지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광복의 기쁨을 누려보기도 전에 전쟁의 비극 속으로 뛰어들어야 했던 아버지의 청춘은 유월의 하늘만큼 찬란하지 못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당신의 청춘은 하얗게 빛이 바래고 있었던 것을. 무관심 속에 무궁화는 조용히 꽃잎을 접었다.

호국영령을 위한 사이렌 소리는 들릴 듯 말 듯 까마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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