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연구원 연구위원

[충청매일] 며칠 전 청주에서 중학생 2명이 아파트 화단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다. 아직 경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두 어린 생명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해당 부모님을 향해 힘내라는 댓글이 달렸다.

이 댓글에 필자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 부모님 마음은 아프겠지만, 위로의 말보다는 따끔하게 혼내주고 싶었다. 당신들 때문에 소중한 생명이 지고 말았다고 말이다. 필자도 죽음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지는 못한다. 가정이 아니라 학교에서의 문제가 원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원인이 어디에 있든 죽음을 선택하기 전에 부모가 상담자가 되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한 부모의 잘못이다.

우리 부모들은 너무 쉽게 자녀에 대한 책임을 저버린다. 때가 되면 학교에 보내고, 학원에 보냄으로 부모의 역할과 책임에서 벗어난다. 사춘기의 중2병이라고 치부해버리고는 심리적 부담감에서 도망치려 한다. ‘애들이 방황하는 것은 사춘기 때문에 그러는 거지 내 잘못이 아니야’라는 생각으로 스스로 위안한다. 자녀의 마음, 학업, 가치관, 진로 등에 대해 가장 중요한 멘토이자 상담자가 되어야 할 부모가 그 모든 것을 학교, 친구, 학원(과외)에 외탁해 버렸다. 우리 사회의 가정문화가 이렇게 형성되어 버렸다.

그리고는 문제 원인을 자녀에게서 찾는다. 수 없이 반복되는 청소년 자살의 대책에서 부모들은 또 도망쳐 있다. 요즘은 학교에 상담 선생님이 근무하면서 학생들의 고민을 덜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예전에 비하면 괄목할만한 개선이다. 청주교육청에서도 위(Wee)센터를 운영하여 학생들에게 찾아가서 자살과 자해를 예방하는 교육과 캠페인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도 부모가 보이지 않는다.

자녀들의 문제는 전부 부모에게서 비롯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부모로서 억울할 수는 있겠지만, 학교나 친구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도 근본은 가정에서 출발한다. 사회의 가장 기초단위인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들을 가르치지 않는(못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상황에서 성장한 자녀는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관계는 책이나 선생님의 교육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관계는 가장 가까운 가족들 사이에서,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의 어린 나이부터 몸(눈빛, 말투, 접촉 등)과 마음으로 익히는 것이다.

집에서 부모나 형제들과 잘 지내지 못하지만, 학교나 친구들 사이에서 관계가 좋은 자녀들이 꽤 많다. 반대로 밖에서는 잘 지내지 못하지만, 가정에서 대화가 잘 되는 자녀도 있다. 어떤 자녀가 더 바람직하고, 어떤 자녀가 더 위험할까? 상담학자들은 전자의 자녀가 훨씬 더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집에서의 모습이 진짜 모습이고, 학교나 친구와의 모습은 가면을 쓰고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친구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가면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결과는 모두 부모로부터 비롯되었고, 전적으로 부모의 책임이다. 돈 때문에, 직장 때문에, 직원들 때문에 힘들다면 그것은 돈과 직장과 직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들을 소유할 지혜가 나에게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자녀 때문에 힘들다면 자녀가 문제가 아니라 나에게 지혜가 없음을 깨닫고 아픈 마음으로 부모됨을 배워야 한다. 꽃다운 나이에 하늘나라로 돌아간 두 생명의 명복을 빌며, 그곳에서 아픔이 없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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