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충청매일] 순간 발을 헛디뎠다. 맨발로 신발장에서 연장을 급히 꺼내려다 슬리퍼 뒤축의 끄트머리를 밟고 말았다. 슬리퍼 한 짝이 팽그르 하더니 자리를 이탈하여 거꾸로 뒤집혔다. 적잖이 상처를 받은 듯 제멋대로 흐트러진 모습이 애처롭다. 의도치 않은 갑작스런 폭력에 휘둘린 것이다.

누구를 처음 알게 되면 그 사람이 몇 살인지 어디 사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를 묻는다. 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하지만 이때부터 나와 구분하는 기준을 설정한다. 선입견 뒤로 그 사람의 본성은 가려지기 십상이다.

일류 대학을 나온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이 목소리를 키우면 잘난 척한다고들 했다. 사소한 일에 실수라도 하면 명문대학까지 나온 사람이 그것도 모르냐면서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또 몸이 불편한 어떤 사람은 자신이 노력한 대가를 장애인에 대한 특별한 배려 덕분으로 치부해서 속이 상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란다. 그 사람 자체를 보지 못하고 자신의 잣대로 제멋대로 판단한 것은 아닐까. 사실 사람의 본성은 비슷하여 잘난 사람이나 부족한 사람이나 그 경계가 모호하다. ‘도(道)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道)가 아니’라고 하지 않던가. 본질을 보지 못하니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으며 살아간다.

초등학교 수학 시간에 숫자와 수, 자릿값을 공부한다. 숫자가 어느 자리에 앉느냐에 따라 그 수는 확연히 달라진다. 숫자 3이 백의 자리에 있으면 그냥 3백이지만 억의 자리에 있으면 3억이 된다. 이를 돈으로 생각하면 얼마나 큰 차이인지 금방 이해가 간다. 그런데 억의 자리에 있던 숫자 3이 다시 십의 자리에 오면 그냥 3십이다. 내려놓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 ‘내가 왕년에는 말이야’하면서 거들먹거리지도 않는다. ‘억의 자리에 있었다고 잘난 척을 하는군’ 한다거나 ‘일의 자리에 있었으니 그것밖에 안 되지’하며 비하하지도 않는다. 본질을 잊지 않기 때문이다. 숫자 3은 어딜 가나 3억도 아니요 3백도 아닌, 그냥 3이다.

사람은 처음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갖지 아니하고 무(無)의 상태로 태어난다. 아기들의 그런 순수함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라면서 인정도 생기고 욕심도 생긴다. 학벌도 쌓아가고 재산을 모으고 남보다 높은 지위를 얻으려 한다. 자신을 채워가는 것이 많을수록 그 사람에게는 유채색(有彩色)이 입혀진다. 그럴수록 자신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착각에 길든다. 스스로만 착각하면 그나마 다행인데 색을 입힌 눈으로 다른 사람을 보니 오해가 생길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때로 가해자 없는 피해자가 될 때가 있다. 딱히 누가 뭐라고 대놓고 한 말은 아닌데 적잖이 마음에 상처를 받곤 한다.

느닷없이 뒤집혀 나뒹구는 슬리퍼를 보니 억울하게 상처받은 사람 같아 마음이 쓰리다. 누군가 제자리에 놓아주기 전에는 어디다 하소연도 못 하지 않는가. 늘 요긴하게 신는 신발임에도 가장 보잘것없이 여기는 슬리퍼라서 더욱 측은하다. 만약 하이힐이었다면 맨발로 디디려 했을까? 슬리퍼도 본질은 구두나 매한가지 신발이 아니던가 말이다. 슬리퍼가 문득 나를 깨우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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