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시인]동양에서는 오랜 세월 세로쓰기를 해왔습니다. 이 세로쓰기는 내력이 있습니다. 동양에 문자가 생긴 것은 3천년 전의 갑골문자인데, 이 갑골문은 주로 짐승의 뼈나 거북의 등껍질에 표시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 썼을까요? 칼끝으로 긁어서 글씨를 표시했습니다. 그래서 갑골문입니다. 그러다가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면서 세수대야나 솥 같은 청동 그릇에다가 글씨를 썼습니다. 그래서 금문이라고 합니다. 그런 뒤에 글씨를 많이 쓰는 시대로 접어들면서 칼로 좀 더 새기기 쉬운 것으로 옮겨갔습니다. 그것이 대나무 조각입니다. 이것을 죽간이라고 합니다.

죽간은 대나무를 길게 쪼개서 한 30cm가량 길이로 자릅니다. 그리고 그 위와 아래를 끈으로 묶어서 펼칩니다. 펼쳐진 나무의 한 쪼가리에 글씨를 씁니다. 따라서 위에서 아래로 쓰게 되죠. 이렇게 대나무 쪼가리를 세워서 왼쪽으로 계속 이어갑니다. 보관할 때는 어떻게 할까요? 대나무 쪽의 위아래에 끈으로 이었으니 도르르 말아놓으면 됩니다. 펼칠 때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펼칩니다.

사극에서 임금이 내린 교지를 읽을 때 종이를 왼쪽으로 펼치는데, 이게 바로 죽간의 자취입니다. 종이가 발명되어 대나무가 필요없는 시대에 접어들었는데도 쓰는 방식이나 읽는 방향은 죽간 시절의 버릇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입니다.

종이는 언제 발명되었을까요? 후한 때입니다. 따라서 공자님 시절에는 종이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때는 대나무 쪼가리이거나 양의 가죽이나 비단이었습니다. 비단이나 양 가죽은 너무 비싸니 대부분 죽간을 썼죠. 우리가 어려서부터 자랄 때 남자는 모름지기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뜻으로 <남아수독오거서>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즉 수레 다섯 대 분량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공자님이 말씀하셨죠? 하지만 이 책이 종이로 된 것이 아니라 죽간으로 된 것이라면 어떨까요? 사서삼경만 죽간으로 옮겨도 대여섯 수레는 될 겁니다. 남아가 읽어야 할 다섯 수레 책은 결코 많은 양이 아닙니다. 아마도 요즘 책 200권 정도만 죽간으로 옮기면 이 정도는 넘칠 겁니다. 책 200권 읽는 데는 몇 년 안 걸립니다.

이와 같이 동양사회의 글쓰기 버릇을 결정한 세로쓰기는 죽간에서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로쓰기가 버릇으로 굳은 서양에서는 어떻게 된 걸까요? 서양의 종이는 이집트 시대의 파피루스인데, 파피루스에는 잉크를 찍어서 씁니다. 잉크가 말리는 데 시간이 걸리죠.

동양처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나가면 방금 전에 쓴 글씨의 잉크가 손에 묻습니다. 그래서 잉크가 마를 때까지 손에 묻지 않는 방향으로 써나간 것이죠. 동양도 그러면 되지 않느냐고요? 동양은 위에서 아래로 써도, 다음 줄은 왼쪽으로 써나갑니다. 그래도 문제가 없습니다. 붓을 썼기 때문입니다. 붓은 손을 허공에 띄워서 씁니다. 잉크 묻을 걱정이 없죠.?

보통 그리스나 로마를 비롯하여 오늘날의 유럽 대륙이 모두 가로쓰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가로쓰기라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는 방식이 있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는 방식이 있습니다. 영어를 비롯하여 우리가 아는 서양 문화권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지만 중동인 아랍권에서는 글씨가 그 반대 방향으로 갑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는 유럽권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는 중동권은 종교로 늘 시끄럽습니다. 두 종교 문화권이 서로 정면으로 맞닥뜨린 것인데, 마치 이 글씨 쓰기가 문명이라는 종이의 한복판에서 충돌하는 형국입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