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1100년 소동파(蘇東坡)의 본명은 소식(蘇軾)이다. 송나라 제일의 문인으로 공자로부터 이어져 온 시경에 철학적 요소를 더해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적벽부(赤壁賦)는 지금까지도 불후의 명작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고려 시대에 소동파의 명성은 자자했다. 과거시험 합격자 발표날이면 새로운 소동파가 나왔다고 평했다. 이는 과거에 합격하기만 하면 그때부터 소동파의 시풍을 배울 정도로 고려 문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소동파는 스물두 살 되던 해에 지방 향시에 합격하여 중앙에서 실시하는 2차 시험에 응시했다. 2차시험 책임자는 최고의 문인 구양수였다. 구양수는 소동파의 답안지를 보고 수석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잠시 뒤에 2등으로 변경했다. 혹시 장원이 자신의 제자일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자기 제자를 수석으로 합격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동파는 제자가 아니었다. 당시 문단의 큰 어른 구양수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그의 답안지는 다음과 같다.

“요임금 때에 고요가 형벌을 주관했다. 하루는 고요가 사형수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아뢰었다. 그러자 요임금이 선처하라고 했다. 고요가 세 번이나 주창했으나 요임금은 세 번이나 선처하라고 명했다. 이는 천하가 고요의 법 집행이 준엄함을 두려워하게 한 것이고 요임금의 관대함을 칭송한 이야기이다. 상을 줄 수도 있고 상을 안 줄 수도 있을 때 상을 주는 것은 지나치게 인자한 것이고, 벌을 줄 수도 있고 벌을 안 줄 수도 있을 때 벌을 주는 것은 지나치게 집행하는 것이다. 인자함은 지나쳐도 군자로서 문제가 없지만 법 집행이 지나치면 잔인한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인자함은 지나쳐도 되지만 법 집행은 지나쳐서 안 된다.”

또는 소동파는 황제의 특명으로 시행하는 시험에 동생과 나란히 합격했다. 황제는 태평성대를 이룰 재상감을 얻었다고 극찬했다. 하지만 잘 나가는 사람은 정적이 많아 시기를 받기 마련이다. 당시 왕안석이 신법을 강행하고 있었는데 소동파는 이를 부당하다고 주장하여 충돌했다. 이로 인해 지방으로 전출하여 한직을 맡았다. 44세 때는 필화사건으로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러다 50세 무렵에 구법이 득세하여 예부상서에 올랐다. 하지만 얼마 후 신법이 다시 세력을 잡자 그는 최남단 섬으로 유배됐다.

섬에서 지내던 어느 날 소동파가 표주박을 메고 산책을 하고 있었다. 길가에서 한 노인을 만났는데 그가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지난날의 부귀영화는 그저 한바탕 봄날의 꿈이로다. 문장으로 천하를 놀라게 하던 사람이 지금은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시골길을 걷고 있으니 말이다.”

소동파는 7년 후에 귀양살이에서 풀려났다. 하지만 귀경하는 도중에 사망하고 말았다. 참으로 쓸쓸한 죽음이었다. 이는 ‘당송사사(唐宋詞史)’에 있는 이야기이다.

일장춘몽(一場春夢)이란 봄날의 한바탕 꿈이라는 뜻이다. 인간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는 하룻밤 꿈처럼 덧없이 사라진다는 의미이다. 시절이 흘러 어느덧 386세대가 집권당의 대표가 되고, 국무총리까지 배출하게 됐다. 이전 시대의 구관들은 이제 하나둘 사라지게 될 터이니 돌이켜 보면 이 또한 봄날의 한바탕 꿈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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