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번역가

[충청매일] 1662년 청나라 강희제는 8세에 즉위하여 61년 간 집권하였다. 많은 업적을 남겨 영명한 군주라 하지만 집권 내내 많은 자식들로 인해 엄청 속을 썩었다. 일찍이 적장자인 윤잉을 태자로 세웠다. 태자는 성인이 되자 갈수록 장수하는 아비가 못마땅했다. 몰래 자신의 세력을 키워 황제의 권위를 위협하였다.

“40년이나 집권했으면 이제 자리를 물려줘야 하는 것 아닌가?”

강희제는 윤잉의 오만함과 무례함을 알고 결국 조서를 내려 태자를 폐하였다. 그러자 출생으로는 장남이나 서자 출신인 윤지가 나서서 아뢰었다.

“윤잉을 그냥 두어서는 아니 됩니다. 후환을 위해서라도 당장 죽여야 합니다.”

형제를 죽이려 하는 위협적이고 흉악한 말에 강희제는 또 한 번 크게 놀랐다. 정신이 번쩍 들어 윤지 또한 멀리했다. 그 무렵 계승권에 가장 유력한 아들은 여덟째 윤기였다. 수완이 좋고 능력이 있어 동생들과 많은 대신들이 지지하고 있었다. 어느 날 태자추천회의가 열렸다. 하지만 윤기가 사전모의를 하여 대신들이 투표를 하였는데 모두 팔(八)자가 나왔다. 강희제는 결과를 보고 크게 놀랐다. 위의 형들을 제쳐놓고 윤기가 모든 대신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면 이는 태자에 오르면 당장에 황제를 쫓아낼 위험한 자식이라 생각했다. 강희제는 회의결과를 없던 일로 하고 이후 윤기 또한 멀리했다. 강희제는 이때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인생의 복이란 부귀영화가 아니다. 제 명대로 살다 편히 죽는 것이다. 나는 그러고 싶다. 하지만 오늘밤에라도 자식들이 나를 황천길로 보낼까 그것이 매일 두렵다.”

이 무렵 몽골 준가르 부족이 급속히 성장해 청나라를 위협했다. 강희제는 14째인 윤제를 통솔 장군으로 세워 서역전쟁에 내보냈다. 윤제는 4년 간 긴 전쟁에서 마침내 승리하여 반란을 평정했다.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북경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에 신하들은 윤제를 유력한 태자로 여겼다. 그런데 윤제가 돌아오기 며칠 전에 강희제가 병으로 누웠다. 급히 자식들을 모두 황궁으로 모이도록 했다. 황궁에 모인 자식들은 부친을 만나 후계자 지명을 받고 싶어 안절부절이었다. 그런 와중에 강희제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대신들이 최후 유언을 공개했다. “넷째 윤진을 후계자로 삼으셨습니다.”

윤진의 지명은 형제들에게 아주 충격적이었다. 그는 존재가 미비한 그저 공손한 아들이었다. 태자 윤잉이 폐위되었을 때 다른 자식들은 그 자리를 노리고 대신들과 교분을 맺어 물밑 작업하느라 바빴다. 그런데 윤진은 집에 찾아오는 대신이 하나도 없었다. 또한 윤진은 강희제를 찾아가 형 윤잉을 봐달라고 눈물로 애원한 유일한 자식이었다. 강희제는 그때 처음으로 윤진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결국 강희제는 죽기 직전에야 자식들 정리를 한 셈이다. 윤진이 황제에 오르니 이가 옹정제이다. 이후 윤진의 형제들은 모두 숙청되거나 추방되었다.

다자다화(多子多禍)란 자식이 많으면 불행도 많다는 뜻이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는 법이다. 자식뿐이 아니라 재산이나 재주나 인기가 많아도 걱정이 따르기 마련이다. 없어도 걱정 있어도 걱정인 인생이 참으로 묘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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