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시인]우리는 근래 한 30여 년 가로쓰기에 익숙해져서 세로쓰기가 굉장히 불편한 것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그런데 가로쓰기나 세로쓰기는 길들기 나름입니다. 가로쓰기가 그렇게 편하고, 세로쓰기가 그렇게 불편한 것이라면, 지난 3천년 동안 동양에서 세로쓰기를 고집해온 것을 어떻게 풀어 말할 수 있겠습니까? 버릇과 길들이기 나름이지 가로쓰기와 세로쓰기는 서로 특징이 있는 겁니다.

어떤 분은 사람의 눈 두 개가 가로로 놓여서 가로쓰기가 편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그건 길들임의 이치를 몰라서 하는 억지 주장입니다. 가로든 세로든 길들면 괜찮습니다. 일본만화는 옛날처럼 페이지가 넘어갑니다. 물론 가로 쓰기 만화도 많지만, 페이지가 그 반대로 넘어가는 만화도 많습니다. 어느쪽이 좋으냐 옳으냐 하는 것이 아니라, 길들기 나름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로쓰기를 한 번 보겠습니다.(사진)

한 번 읽어보십시오. 어떤가요? 불편한가요? 그럴 겁니다. 지난 30년 넘게 가로쓰기의 횡포를 당해온 눈으로서는 그럴 겁니다. 그러나 붓글씨를 쓰는 분들에게 읽어보라고 하십시오. 전혀 불편함이 없습니다. 길들임의 특징을 말하려는 것이니, 억지로 거꾸로 말하지 말하려 하실 것 없습니다. 그러면 그런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요. 자, 이걸 가로쓰기로 해보겠습니다.

벌판한복판에 꽃나무하나가있소. 근처(近處)에는꽃나무가하나도없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를열심(熱心)으로생각하는것처럼열심으로꽃을피워가지고섰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소. 나는막달아났소. 한꽃나무를위(爲)하여그러는것처럼나는참그런이상스러운흉내를내었소.

이것을 띄어쓰기로 옮겨보겠습니다. 다음입니다.

벌판 한 복판에 꽃나무 하나가 있소. 근처(近處)에는 꽃나무가 하나도 없소.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를 열심(熱心)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열심으로 꽃을 피워가지고 섰소.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에게 갈 수 없소. 나는 막 달아났소. 한 꽃나무를 위(爲)하여 그러는 것처럼 나는 참 그런 이상스러운 흉내를 내었소.

어떤가요? 뜻을 받아들이는 데 편안해졌나요? 좀 더 편안해졌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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