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번역가

[충청매일] 250년 삼국시대 말기, 유비의 촉나라와 조조의 위나라가 망했을 때 손권의 오나라는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태자 손등이 죽은 후에 분위기가 달라졌다. 손권은 왕부인이 낳은 장남 손화를 태자로 삼고 동시에 차남 손패를 노왕에 봉했다. 그런데 손권은 어린 손패를 더 귀여워하여 두 아들을 똑같이 대우했다.

손권의 이런 태도가 군신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언젠가 태자가 폐위되고 손패가 태자에 오를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군신들은 태자파와 노왕파로 나뉘게 되었다. 태자파는 태자의 자리를 지키려 하였고 노왕파는 태자가 폐위되도록 공격했다. 9년 동안 파벌이 갈라지자 손권은 결국 분노했다. 두 파벌을 처벌하고 제 삼자를 태자로 세우기로 했다. 손화는 태자에서 폐위되어 남양왕으로 강등되었다. 노왕 손패에게는 죽음이 내려졌고 측근들은 모두 주살되었다. 그리고 손권의 후첩 반씨가 낳은 아들 8살 손량을 태자로 세웠다. 2년 뒤 손권이 죽자 10살 손량이 오왕에 올랐다.

하지만 중신들에게는 여전히 파벌의 후유증이 남아 있었다. 대장군 제갈각은 태자파였고 무위장군 손준은 노왕파였다. 제갈각은 사마씨와의 전쟁으로 오나라의 국력을 회복하려 했고, 반면에 손준은 내정을 먼저 바로 잡아야 한다며 반전론을 주장했다. 마침 제갈각이 출병했다가 전염병으로 병사 절반을 잃고 돌아오자 손준이 기회를 잡았다. 궁궐에 병사를 매복시켜두었다가 제갈각이 들어서자 바로 생포하여 그 자리에서 주살하였다. 손준이 오나라의 실권을 쥐게 되었다.

그러자 옛 태자파 장군들이 손준을 암살하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손준의 권력은 사촌동생 손림이 계승했다. 하지만 손림은 손준보다 횡포가 더 심했다. 그러자 태자파들이 손림 타도를 외치고 들고 일어섰지만 오히려 모두 숙청되고 말았다. 손림은 철저했고 그 권력은 오왕 손량을 넘보고 있었다. 그러자 오왕 손량이 중신들과 모의하여 손림을 살해하려 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손량은 재위 6년 만에 폐위되고 회계왕으로 강등되었다. 오나라는 갈수록 혼란에 휩싸였다.

손림은 손권의 6남인 24살 손휴를 제위에 앉혔다. 이어 궁궐의 근위군과 왕실 요직에 모두 자신의 심복으로 채웠다. 이제 손림이 결심만 하면 제위에 오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손휴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손휴는 장군 장포와 은밀히 공조하였다. 어느 날 손휴가 궁궐에서 형식적으로 손림에게 하례를 받을 때였다. 기습적으로 왕실무사들을 불러 손림을 포박하고 그 자리에서 주살했다. 손휴가 비로서 오왕의 권위를 되찾았다. 오나라는 혼란을 벗어나는 것 같았다. 손휴가 서른 살에 죽고 손화의 아들 손호가 제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술과 여자에 빠졌고 함부로 신하를 죽여 엽기적이고 잔혹했다. 사마씨의 진(晉)나라가 쳐들어오자 바로 항복하고 말았다. 오나라는 그렇게 멸망했다. 이는 ‘삼국지(三國志)’에 있는 이야기이다.

회광반조(回光返照)란 해가 지기 직전에 잠깐 하늘이 밝아진다는 뜻이다. 사람이 죽기 전에 잠시 정신이 돌아오거나 사물이 쇠멸하기 전에 잠시 왕성해지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진리를 찾기 위해 자신을 돌아본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인생이나 가정이나 조직이나 나라나 혼란이 반복되면 결국 끝이 다가오는 것이다. aione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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