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충청매일] 지난 주말 감자를 심었다. 사람들 대부분은 작은 텃밭에도 비닐을 씌우고 감자를 심는다. 풀 뽑는 번거로움을 피하고, 땅 물기가 증발하는 것을 막고, 씨알을 더 굵게 만들 목적으로 비닐을 씌우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비닐 속에서 키운 감자와 그것을 먹는 사람은 얼마나 소통이 될까?

사람은 온대의 대기 속에서 산다. 비닐 속 감자는, 비닐에 가로막혀, 대기의 바람, 비, 햇볕을 온전히 맞지 못한다. 비닐 속 온도는 대기보다 훨씬 더 높아, 감자는 열대나 아열대 식물처럼 자란다. 온대의 대기 속에서 사는 사람이 열대나 아열대 식물을 먹는 꼴이 되니, 이건 전혀 신토불이가 아니다. 가능하면, 농사에서 비닐을 쓰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난 검사를 하던 2003년부터 지금까지 20여년간, 전주, 인천, 서울 등 여러 곳을 다니면서도, 외국에서 생활한 1년을 빼고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텃밭농사를 짓고 있다. 지금은 150평 되는데, 여태 밭에 비닐을 씌운 적이 없다. 비닐을 쓰지 말아야 할 논리적 이유는, 나중에 생태귀농학교에서 배웠지만, 그 전부터 자연과 나를 가로막는 이물질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10여년 타향을 떠돌다 고향 청주로 돌아와, 7년 전쯤 박을 키워 바가지를 만들었다. 밤에 피는 하얀 박꽃에 매료되었고, 박을 삶아 안팎으로 긁어낸 다음, 응달에서 말려 바가지를 만드는 즐거움도 컸다. 그때 만든 바가지는 지금도 씨감자를 담거나 열매나 채소를 거둘 때 등 여러모로 쓰고 있다. 이번에 감자 심을 때는 바가지 한쪽에 금 간 곳을 철사로 꿰맸다. 꿰매니 더 정이 갔다. 씨감자를 담아, 비닐을 씌우지 않은 감자밭 두둑에 올려놓으니, 모든 것들이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잘 어울린다. 내 마음마저도. 정서는 그렇게 정화되는 것이다.

이 경험을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아는 신부님이 댓글로 조표자가(弔瓢子歌)를 소개해 주셨다. 이것은 조선시대 한 부인이 박 바가지가 깨진 것을, 사람이 죽은 것처럼 슬퍼한 가사(歌辭)다.

“오호통재 오호애재 다락방을 청소하다/ 아차실수 손을 놓아 두쪽으로 내었으니/ 애닯도다 슬프도다 이바가지 어이하리/ 아름답고 고운자태 삼십년을 곁에두고/ 너를사랑 하였거늘 차마못내 아까워라…”

30년을 같이 한 바가지에 부인의 생명이 들어가 서로 소통하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사람과 물건의 애정과 소통도 이러할진대, 사람과 사람의 그것은 당연히 그러해야 할 것이나, 오늘날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심성의 타락은, 그러한 애정과 소통에서 더 멀어지게 하고 있다. 휴대폰 기능의 극히 일부만 사용하고 있을 뿐인데도 새것이 나오면 바꾸려 하고, 조금만 욕심을 내려놓으면 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음에도 큰 집, 더 돈을 벌 수 있는 집을 마련하려고 한다. 인간관계도 이해타산으로만 접근할 뿐이니, 서로 간에 참된 믿음은 없다.

30년간 바가지를 가까이하고, 그것이 깨진 것에서 사람이 죽은 것과 같은 슬픔을 느낄 자, 현대인 중에서 몇이나 될까? 플라스틱 바가지로 밥 지을 쌀을 씻으면서, 올해는 박 바가지를 꼭 하나 더 만들어, 그것으로 쌀을 씻어보자는 생각을 해 본다. 반평생을 조금 더 살아보니, 거기에 행복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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