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테라피 강사

[충청매일]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아버지는 처마 끝에 새기줄을 매달아 놓았었다. 그 새끼줄을 따라 덩굴을 뻗어나간 나팔꽃, 수세미, 여주가 주렁주렁 열릴 때쯤엔 한 여름의 소나기가 시원하게 내리고, 창 가에 앉아 그걸 바라보면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아버지가 남겨주신 사랑이다.

따뜻한 추억을 되돌리며 조던 스콧 글·시드니 스미스 그림의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를 펼쳐본다. 지상 낙원이란 이름이 어울리는 캐나다에서 태어나 자란 작가들이 그 자연의 존엄함을 인간의 감정에 이입시켜 한편의 시그림책을 펼쳐주며 평범하지 않은 아이의 마음을 아름답게 치유해주는 보석 같은 책이다.

주인공 ‘나’는 말이 어눌한 아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눈부신 햇살과 함께 소리들이 들려온다. 낱말의 소리, 나를 둘러싸는 소리, 창 너머 소나무의 스 나뭇가지 위 까마귀의 끄. 아침마다 나를 둘러싸는 소리를 들으며 깨어나지만 난 어떤 것도 말할 수가 없다. 소리를 내어보아도 모두 뒤엉켜 웅얼거림이 되어 나온다. 다시 조용해지며 돌멩이처럼 되어 소리 없이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가지만 맨 뒷자리에 앉아 말할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선생님 나에게 무언가를 물어보면 아이들은 모두 나를 본다. 아이들은 내 입에서 혀 대신 소나무가 튀어나오는 걸 보지 못하고, 목구멍 안쪽에서 까마귀가 우는 걸 듣지 못하고, 입을 열 때 스며 나오는 별빛을 보지 못한다. 저희들처럼 말하지 않는다는 것에만 귀 기울이고, 내 얼굴이 얼마나 이상해지는지만 보고, 내가 얼마나 겁먹는지만 본다. 내 입은 꼼짝도 하지 않고 아침의 그 낱말들로만 가득 찬다.

아빠가 나를 데리러 학교에 오셨고 아빠는 내가 발표를 잘못한 걸 알고 조용한 데로 가자고 한다. 아빠와 나는 알록달록 바위와 물벌레들을 살펴보며 강을 따라 걷는다. 아빠와 함께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하지만 발표하던 시간이 자꾸만 떠오른다. 뒤틀리고 일그러지는 내 입술을 지켜보고 키득거리며 비웃는 그 많은 입들이…. 그러면 뱃속에서 폭풍이 일어난 듯하고 두 눈은 빗물이 가득 찬다. 내가 슬퍼하자 아빠는 나를 가까이 끌어당겨 강물을 가리킨다.

“강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이지? 너도 저 강물처럼 말한단다.”

나는 강물을 본다. 물은 때로 물거품이 일고 소용돌이치고 굽이치다가 부딪친다. 조용히 눈을 감고 강물 속으로 들어가 본다. 반짝이는 강물 속에서 생각한다. 아빠는 내가 강물처럼 말한다고. 난 울고 싶을 때면, 말하기 싫을 때면 이 말을 떠올리며 울음을 삼키고 말을 할 수 있다. 나를 둘러싼 낱말들을 말하기 어려울 때는 그 당당한 강물을 생각한다. 물거품을 일으키고, 굽이치고, 소용돌이치고, 부딪치는 강물. 그 강물 너머의 잔잔한 강물도 떠올리면 그곳에서 강물은 부드럽게 반짝거리고 내 입도 그렇게 움직이며 그렇게 말을 한다. 강물도 더듬거릴 때가 있다. 내가 그런 것처럼. 말을 더듬으면서 나는 누군가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 동시에 철저히 혼자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나도 가끔은 아무 걱정 없이 말하고 싶지만 그건 내가 아니다. 이제 나는 학교에 가면 발표시간에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 그 강에 대해서 말을 한다. 강물처럼.

‘나는 강물처럼 말하는 사람이에요.’는 아이의 약함과 어려움을 긴 호흡으로 보면서 스스로 일어설 힘을 이끌어내는 어른, 아빠의 위안이고 격려이다. 유년에게 이런 아빠는 안도하며 자라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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