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그러나 당장 충주관아로 쳐들어가는 것은 무리였다. 충주관아는 충청좌도의 가장 큰 고을로 그곳에는 병권을 가진 목사와 병영이 있었다. 더구나 충주는 영남대로의 군사적 요충지에 있기 때문에 유사시 사방에서 군졸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농민군지도부로서도 진퇴양난에 빠졌다. 약간의 군졸과 수졸이 지키던 청풍 내성을 공격하면서도 많은 농민들이 죽고 상했다. 그런데 충주관아는 정예 중 정예병들이 방비하는 곳이며 언제든 군졸들을 요청할 수 있는 곳이었다. 농민군들이 위안을 삼을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머릿수뿐이었다. 숫자만 믿고 충주읍성을 공격하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보다도 더 무모한 짓이었다. 그렇다고 충주목사의 의도를 분명히 안 이상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만도 없었다.

농민군지도부에서도 즉시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관아를 점령하고 난 후 각자의 마을로 돌아갔던 농민들에게 연통을 띄워 다시 청풍읍성 도회장으로 집결하도록 통보했다. 청풍읍성으로 농민군들이 집결을 시작했다. 그러나 파생되는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당장 시급한 것은 식량이었다. 굶주려본 사람들은 굶주림만큼 세상에 고통스러운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굶주림에 지친 농민군들의 약탈이 일어나고 그로인해 고을민들 원성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면서도 지도부에서는 모르는 척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탐학이 싫어 봉기한 농민군들이 도둑질로 고을민들을 괴롭힌다면 그 또한 탐학을 일삼던 관속이나 양반지주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농민지도부에서도 군령만으로 이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한시라도 책임 있는 관리나 관아로부터 약속을 받고 각자의 마을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는 것이 근본적인 대책이었다. 그러나 약속은커녕 충주목사는 농민군들의 뜻을 전하러 간 대표들을 옥에 가두었다. 이제 남은 방법은 농민군들을 이끌고 충주읍성으로 진군하여 직접 뜻을 전달하고 약속을 받아내는 길 뿐이었다.

“관아의 답변만 기다리다 이렇게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지 않겠소?”

우장규 농민군대장은 각 군장들에게 자신의 뜻을 비쳤다.

“우 대장, 청풍읍성 싸움과는 달리 그곳까지 농민군을 움직이려면 선결되어야 할 문제들이 많지 않겠소이까?”

각 군장들이 우려하는 것도 당연했다.

충주읍성은 청풍에서 물길로는 육십여 리, 육로로는 험한 길 일백여 리였다. 거기까지 농민군들을 이끌고 가 충주목사를 압박하고 농민군들의 뜻을 관철시키려면 한두 가지 문제가 걸리는 것이 아니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관군과의 사이에 전투를 벌이게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지금의 농민군 상태로는 자멸이나 마찬가지였다. 우장규 농민군대장은 중군장 차대규를 불러 북진여각 최풍원 대행수에게 도움을 청하도록 명했다.

“북진여각도 매우 어려운 상태라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현재 북진여각 외에는 청풍에서 우리 농민군들을 도와줄 곳이 없소이다. 그러니 중군장이 최풍원 대행수에게 직접 청을 넣어주시오.”

우장규 농민대장이 차대규 중군장에게 절실한 어투로 말했다.

이미 농민군지도부는 북진여각 최풍원 대행수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이 농민군들을 도회장으로 집결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최 행수가 여러 어려움을 견디며 농민군을 도왔던 것을 알고 있는 우 대장으로서는 또 다시 부탁을 한다는 것이 쉬운 결단은 아니었다.

그러나 도회가 시작되면서부터 애초 농민군지도부의 계획과는 많은 부분에서 차질이 생겼다. 당초 지도부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몇 배는 많은 고을민들이 골골에서 모여들었다. 그만큼 관아와 양반지주들의 횡포로 고을민들의 쌓인 원한이 깊음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지도부에서는 이런 정도의 고을민들 뜻이라면 청풍관아에서도 그 뜻을 곧바로 수렴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농민군들 뜻이 관철되면 해산을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조 부사와 관속들은 고을민들의 도회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결국 관아를 강제로 점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러다보니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파생되었고 시일은 자꾸만 흘러가게 되었다. 당연지사 북진여각 최 대행수로부터 받았던 돈과 양식도 바닥을 드러낸 지 이미 오래 전이었다. 

농민지도부의 연통을 받은 북진여각에서도 최풍원 대행수와 차대규 중군장이 무릎을 맞대고 앉아 대책을 숙의하고 있었다.

“차 객주, 지금 농민군지도부와 농민들 분위기는 어떠한가?”

최풍원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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