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충청매일] 드디어 함진아비가 지고 온 함을 대지에 풀어놓았다. 이제 더는 봄이네 겨울이네 주춤거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턱 끝에 닿는 기운이 목화솜처럼 부드럽다. 운동을 끝내고 친구와 그냥 헤어지기 아쉬워 나물 캐러 가기로 마음을 모았다. 

오창 저수지 근처로 향했다. 버들개지가 벌써 포슬포슬 솜털을 입었다. 여기저기 만물이 잠에서 깨느라 속살거린다. 아직은 군데군데만 파릇하다. 나비를 쫓아가는 어린아이처럼 우린 이리저리 냉이가 있을 만한 곳을 살폈다. 어느새 뽀얀 쑥이 쑥쑥 올라오고 있다. 신부의 반지에 박힌 다이아몬드처럼 작은 꽃을 피운 꽃다지도 눈에 띈다. 낯이 붉은 나싱개도 벌써 꽃대를 밀어 키를 높였다. 집 안에서는 아직 겨울인 줄 알고 봄을 기다리기만 했다. 이렇게 마중을 나오면 일찍 만날 수 있는 것을.

봄이면 화려한 벚꽃축제나 꽃구경을 나서는 것보다 이렇게 나물 캐며 봄을 맞는 것을 더 좋아한다. 아마 어릴 적 추억이 있어서 그런가 보다. 친구들이나 언니들과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틈만 나면 작은 소쿠리를 들고 나섰다. 향교 옆으로 난 언덕을 넘어 우암산 아래 이곳저곳을 누비며 나물을 캐고 찔레순을 꺾었다. 송홧가루를 받아 모으기도 했다. 언덕배기에 올라서서 동네를 내려다보면 내 꿈도 동산 만 해졌다. 이곳저곳을 쏘다니다 해거름이 돼서야 꾀죄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한 아름 꺾어온 개나리와 진달래는 사이다병에 꽂아 봄을 들여놓았다. 우리들의 봄은 그렇게 지나갔다.

뭐니 뭐니 해도 봄놀이 중 으뜸은 나물 캐기였다. 바구니를 채우며 ‘소유’의 의미를 배웠다. 누가 더 많이 캐는지 은근슬쩍 견주기도 하면서 ‘비교’를 알았고 ‘욕심’을 알았다. 간초롬히 다듬어가며 캐는 친구도 있고 한 움큼씩 바구니에 담아 집에 가면 다시 손질하는 친구도 있다. 나물뿐 아니라 성격까지 소쿠리에 담았다.

봄볕을 등에 지고 봄나물과 상상여행을 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때는 누구의 간섭이나 제지를 받지 않아 더 좋아했던 것 같다. 한참 게임에 빠져있던 아들에게 게임이 왜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을 때 들었던 대답도 그랬다. 캐릭터를 제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어서 좋단다.

요즘에야 나물을 캐며 노는 아이들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이런 재미도 모르고 큰다며 안타까워한 적이 있다. 그렇다고 옛날의 놀이를 강요할 수는 없다. 안타까워할 일도 아니다. 저희는 저희 나름의 세계에서 흥미를 찾고 즐거워하지 않는가. 변해가는 세상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데는 우리보다 그들이 훨씬 빠르다. 어쩌면 우리도 그 이전의 세대가 했던 놀이나 문화를 버리고 지나왔는지 모를 일이다. 소크라테스도 “요즘 애들은……쯧쯔.” 하면서 혀를 찼다고 하지 않던가. 내가 오늘 추억 놀이에 빠진 것처럼 우리 아이들도 나중에는 그들 나름의 추억을 떠올릴 것이다. 그 모양과 색깔이 어떠할지 궁금하긴 하지만 말이다. 훗날 우리 아이들의 봄을 상상하며 봄을 캔다. 실바람에 냉이 향이 실려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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