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자유는 물리적인 속도와 정확히 반비례한다. 그건 자동차와 자전거와 걷는 행위를 비교해 봐도 알 수 있다. 멈추고 싶을 때 누가 멈출 수 있는가? 되돌아가고 싶을 때 누가 되돌아갈 수 있는가?”

청주에서 노동인권센터 일을 하다가, 함양으로 농사지으러 간 한 노무사님이 쓴 표현이다. 그는 철저한 생태주의자다. 오줌과 똥을 퇴비로 만들고, 빗물을 받아 쓴다. 집을 짓는데, 정화조도 쓰지 않으려고, 법적으로 가능한지 나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자신의 행위로 생겨나는 그 어떤 것도 함부로 버리지 않으려 한다. 그는 그렇게 속도를 줄여 더 큰 자유를 얻으려 하고 있다.

난 작년 4월 사무실을 새로 내면서, 가까운 주차장에서 매달 정액 주차권을 샀는데, 이번 3월부터는 그만두었다. 최근 6개월 동안 주차장을 이용한 것이 한 달에 한두 번 정도였으니, 이젠 이용할 필요가 없음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다. 그 기간 동안 자전거가 차를 대신했다. 모질게 추운 날에도 거의 빠짐없이 자전거로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출퇴근했다. 교도소 접견이나 교육청 회의에 갈 때도 가능하면 자전거를 이용하고 있다. 이제 자전거는 나의 일상이 됐고, 차를 운전하는 것이 어색할 지경이다. 나도 이렇게 삶의 속도를 줄이며 자유를 늘려가고 있다.

봄이 오면, 봄바람이 전해 오는 생명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땅과 나무껍질을 뚫고 터져 나오는 생명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그 놀라운 몸짓에 감동할 수 있어야 한다. 비바람과 따뜻한 햇볕을 자주 온몸으로 부딪치며 파고들어가 봐야 자연과 하나가 될 수 있다. 팔다리와 오감을 다 동원해 자연이 펼치는 변화를 제대로 느끼려고 노력해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자연스러움이 행복이다.

그런데 자본은 사람의 행복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자본은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곳곳에서 다 막고, 탐욕으로 가득 찬 자신의 몸뚱어리를 끝없이 키우고 있다.

자동차로 갈 수 있는 곳이 아주 많은 것처럼 보인다. 멀리, 여러 곳을, 빨리 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자동차로 이동하면서는 자연과 거의 교감할 수 없으니, 자동차로는 도착한 곳만 갈 수 있다. 걷거나 자전거로 움직이면, 자동차처럼 멀리, 여러 곳을 못 가도, 움직이며 닿는 모든 곳이 가는 곳이다. 지나는 곳들을 오감으로 다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자동차는 이렇게 빠름으로 사람을 현혹하며 행복을 가로막는다.

휴대폰은 소통의 대명사처럼 보인다. 온갖 정보를 순식간에 검색하고, 수많은 사람들과 동시에 연결될 수도 있다. 그러나 휴대폰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마주 앉아서도 휴대폰을 본다. 상대방의 눈빛을 보지 않고 자연의 변화도 살피려 하지 않는다. 이제 그것은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 되었다. 왜 그것이 참다운 행복이 되는 것인지 모르고, 휴대폰 놀이에만 더 탐닉한다.

자연스러움이 행복이라는 말에는 많은 이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런데 자본이 만들어낸 문명의 이기(利器)란 것이 대개는 참다운 행복의 방해꾼이 되고 있다는 말에는 얼마나 동의할까? 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그것이 자연과 멀어지는 것이라면, 불행의 씨앗이 될 수밖에 없다. 오늘도 자전거 페달을 밟기 전, 오가는 길에서 어떤 기운을 느낄지, 내 맘은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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