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충청매일] 얼마나 무섭고 추웠을까. 내복 바람으로 거리를 헤매는 세 살배기 아이를 이웃 주민이 구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수은주가 종일 영하 두 자릿수로 곤두박질한 그야말로 엄동설한이다. 흠뻑 젖은 속옷이 얼어붙은 채 거리를 헤매는 아기가 내 손주 같아 마음이 출렁 내려앉는다. 나 역시 여섯 살 때 시장에 가신 엄마를 찾아 나섰다가 길을 잃은 적이 있다. 혼자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의 두려움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엄마가 일을 나간 사이 아가는 엄마를 찾아 밖으로 나왔다가 문이 잠겨버렸다는 얘기다. 이런 일은 전에도 몇 번이나 있었다는데 아이를 방치한 엄마의 무책임이 사람들을 분노케 한다. 돌아서면 저절로 잠기는 자동문을 설치해놓고 엄마는 얼마나 마음 든든했을까.

늦게 귀가하는 가족이 있으면 대문 빗장을 풀어 문을 살짝 열어놓았던 때가 있었다. 너무 늦다 싶으면 귀를 쫑긋 세우고 지나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도 모두 귀에 담았다. 마지막 들어서는 가족이 빗장을 걸어야 하루를 닫았다. 가로등이 훤히 들여다보는 마당엔 그제야 기다림의 여운도 끝이 났다.

싸리로 만든 사립문은 허술하기 그지없다. 담장에 외기둥만 세워 달았으니 비스듬히 기울어져 똑바로 닫을 수도 없었다. 지게 작대기로 그나마 균형을 잡을 뿐이었다. 오히려 사립문이 닫혀있으면 그 집에 우환이 있나 이웃은 걱정했다. 대문은 안부를 확인하는 입구였을 뿐이다.

언제부턴가 사람이 하던 일을 기계가 대신 하더니 급기야 단 한 번의 터치도 필요 없이 눈만 흘겨도 만사가 저절로 해결된다. 오토매틱 운전에 신기해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버튼만 누르면 알아서 주차를 해주는가 하면 아예 손을 놓고도 저절로 가는 자율주행차가 대세가 될 거란다. 세상 변해가는 속도에 마음만 어질어질하다. “금 나와라 뚝딱!”하고 주문만 외면 바위문이 열리던 옛날이야기 속 도깨비보다 더 영험한 도깨비 방망이를 현대인들은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방망이를 쓸 줄 몰라 나는 매번 바위 뒤에 숨어서 지켜보는 소년이 되기도 한다.

휴대폰의 많은 기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 비싼 값을 주고 샀음에도 값어치를 제대로 못 할 때가 많다. 국문을 모르시던 우리네 할머니와 지금의 내가 무엇이 다른가 자괴감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게다가 잠시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모든 것이 깜깜해져 곧바로 바보가 돼버리고 만다.

세상은 점점 자동화, 인공지능화가 되어 편리함을 얻은 대신 여유를 잃었다. 손 까딱할 여유도 없다. 뒤돌아볼 새도 없이 집을 나서도 알아서 문이 잠긴다. 인간은 필요 없다는 듯이.

자동문이 아니었다면 아이는 어떻게든 다시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기계에 외면당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내가 놓은 덫에 내가 걸린 격이다. 견고한 자동문만큼이나 마음도 무겁다. 인간이 만든 규범에 스스로 노예가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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