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그러나 조 부사도 최풍원이 개인적으로 십오만 냥이라는 상평통보를 몰래 주조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껏해야 공임으로 일이천 냥을 더 만들었을 것으로만 믿고 있었다. 그 정도라면 그 돈이 장마당에 풀려도 물가에는 큰 변동을 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북진여각에서 만들어진 사주전은 청풍관아에서 만들어진 관전과 섞여져 무사히 한양의 호조로 입고되었다.

최풍원은 대장장이 천 노인에게 나머지 십만 냥의 사전 주조를 당부하고, 이미 만들어져 있던 충자전 오만 냥을 가지고 한양으로 올라갔다.

“충자전은 받을 수가 없다. 한양의 주전소에서 만든 엽전으로 가져 오너라!”

탄호대감이 돈궤를 물리쳤다. 탄호대감은 지방에서 주조한 엽전은 믿을 수가 없으니 한양에서 주조된 동전을 가져오라는 말이었다. 대궐에 있는 대감들이 허락을 해서 만들어 유통시킨 돈이었다. 그런데 그들조차 지방에서 유통되고 있는 돈을 믿지 못하는 실정이니 얼마나 많은 사전들이 장마당에 흘러 다니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라에서 고액의 당백전을 남발해서 상평통보 유통에 문제가 발생한 이후 시장의 화폐 유통체제는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 당백전의 유통은 격심한 물가 상승을 초래했다. 미곡 한 석에 네다섯 냥 하던 것이 한 해만에 마흔 냥 이상으로 급등했다. 이로 인해 일반 백성들의 생활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이 뿐만 아니라 팔도 곳곳에서 발행된 상평통보는 액면 가치는 똑같았지만 함량이 각기 다르고 동전의 크기 또한 제각각이었다. 주된 이유는 주조 이득을 높이기 위해서 함량과 크기를 줄였기 때문이었다. 돈이 많아지자 물건 값이 오르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자 돈의 가치는 추락하고 물가를 관장하던 호조에서는 대량의 미곡과 면포를 풀어 상평통보의 구매에 나섰다. 그러면 또다시 동전의 수효가 달려 전황이 발생했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해서 되풀이되자 백성들은 종잡을 수 없이 가치가 등락하는 화폐를 좀처럼 믿지 못했다. 그러자 화폐를 기피하고 서로에게 필요한 물건을 맞바꾸는 물물교환마저 성행하고 있었다.

똑같은 액면의 상평통보인데도 탄호대감이 청풍에서 만든 충자전 대신 한양에서 만든 상평통보를 원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한양에서 만들어진 상평통보가 지방관아에서 만들어진 그것보다 훨씬 더 높은 교환가치로 유통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최풍원은 북진여각에서 몰래 만들고 있는 사전 삼만 냥을 더 가지고 내려와 팔만 냥의 충자전으로 한양의 상평통보 오만 냥을 교환해 탄호대감의 돈을 갚아야 했다.

탄호대감의 급전은 해결했지만 북진여각에서 지고 있는 십만 냥의 빚 중에서 아직도 반절 가까이는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탄호대감의 빚을 갚느라 생각지도 못했던 삼만 냥의 돈이 더 쓰였고 북진여각의 별채에서 사전을 주조하는 데도 수월찮은 돈이 들어갔다. 최풍원이 사전 주조를 했던 것은 이번 기회에 모든 부채를 갚고 새롭게 출발을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북진여각의 규모를 줄이고 한양 삼개상전의 봉화수에게 힘을 보태 그곳을 키워보려던 했던 것이다. 목숨까지 걸어가며 사주전까지 몰래 만들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최풍원은 북진여각의 상운을 걸고 건조했던 조운선의 반 수를 이번에 잃어버리고 말았다. 여기저기 처처에서 승냥이가 노리고 있는 이런 시절에는 재산을 불리기는커녕 가지고 있는 재산을 지키는 것도 힘겨웠다. 참으로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이 혼란스럽기만 한 시절이었다.

“빌어먹을 힘이라도 남아 있어야 꿈쩍거려보지, 이러다 앉은 자리에서 빼빼 말라 뒤지겄다!”

“증말 환장허겄구먼!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니 뭘 어떻해야 할지 아무 생각이 없구먼!”

“고을민들은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는데도, 청풍관아에서는 이것저것 세금을 내라 목을 조이고 있으니 워떻허냐?”

“신임부사는 도대체 고을민들 사정을 안중에나 두고 있는 거여 뭐여!”

청풍 고을민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원망만 늘어갔다.

청풍 고을민들만 힘든 것이 아니었다. 북진여각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북진여각이 겪은 몇몇 일만으로도 웬만한 상전은 진즉에 문을 닫았을 터였다. 그런데도 여태 여각을 이끌어온 것은 장마당 덕분이었다. 그리고 장마당은 고을민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마당은 고을민들이 주인이었다. 그런데 고을민들의 살림이 쪼그라들어 가지고 나올 물산이 메말라버리자 장마당 역시 쪼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장마당이 쇠락할수록 북진여각은 직접적으로 타격을 입었다. 문제는 고을민들의 형편이나 북진여각의 앞날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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