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테라피 강사

[충청매일] 그림형제의 ‘브레멘 음악대’는 주인집에서 버림받고 음악가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브레멘으로 가는 동물 네 마리의 이야기이다. 작가 루리는 그 이야기를 현대사회에 맞게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라는 제목으로 바꾸어 썼다. 당나귀, 강아지, 고양이, 닭이라는 등장 동물들은 같은 종이지만 이야기 내용은 패러디답게 다르다.

앞 면지를 펼치면 멋진 흑백도시가 나온다. 이정표에는 ‘여기부터 속도를 줄이시오. 브레멘 직진 500m’라고 적혀 있고, 빌딩 위 전광판에는 ‘브레멘’ 세 글자가 빛난다. 표제지에는 어두운 저녁 무렵 지하철을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 동물들이 작게 그려져 있다.

운전하다 나이가 많아 해고된 당나귀, 식당 주인이 이사를 간다며 버리고 간 바둑이, 눈이 이상해서 편의점에서 해고당한 고양이, 골목 노점상을 하다 쫓겨난 꼬꼬댁은 지하철을 타고 주위 눈총을 참아낸다. 하염없이 달리다가 캄캄한 밤에 허름한 마을에서 내린다. 넷은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가서 당신들도 열심히 살았는데도 할 일이 없어졌느냐고 묻는다. 열심히 살아도 소용이 없다는 답을 듣고는 그럼 우리는 뭘 해야 하느냐고 고민하는 장면에서 도둑과 동물들이 머리를 맞댄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그 와중에 뱃 속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난다. 절망하는 도둑들 앞에 꼬꼬댁씨는 팔던 두부를, 야옹이가 삼각 김밥, 바둑이가 마지막 남은 김치, 당나귀가 동료들이 준 이별 선물을 기꺼이 내놓는다. 도둑들은 집에 있던 냄비 가스렌지 수저 양초를 내놓는다. 곧 커다란 냄비에 찌개가 맛있게 끓기 시작하고 모두 다 한결같이 대박 난 ‘오늘도 멋찌개’ 가게를 상상하며 냄비를 비운다, 어깨를 맞대고. 뒷 면지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열심히 일하는 그들 모습이 친절하게 칼라로 그려져 있다. 리모델링 되어 옛날의 모습을 현대로 바꾼 달동네에서.

구조조정으로 일터를 떠나야 하는 가장, 아이 기르느라 경력이 단절된 주부, 어떤 이유로든 제 밥벌이를 흔쾌히 하기 어려운 젊은이, 노후대책을 못해 노점으로 생계를 꾸려야 하는 노인들. 비대해진 자본의 시대에는 반드시 자본의 강자와 약자가 생겨난다. 공평한 분배는 이상에 가깝다. 자본주의의 맹점처럼 존재하게 되는 약자들, 생활의 변두리로 밀려나게 되는 이들의 삶을 반짝이는 위트로, 엄중한 그림으로 이야기를 풀어낸 것 같다. 브레멘 음악대를 읽어본 독자들은 제목이 너무 절망적이어서 지레 고개 저을 수도 있겠지만 그 속으로 들어가 보면 전혀 다른 세상이다. 동물과 인간이 같이 등장하는 것이 다르고, 마냥 어두운 전개만은 아니며, 마지막에는 다른 방식의 전망을 제시해 제목과는 다른 결론에 이른다.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진정한 브레멘’은 어디인지, 브레멘이 있기는 한지, 있다고 한들 모두가 원하면 도달할 수는 있는 곳인지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경제의 격차가 날로 심해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브레멘을 찾는 이들,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인내해 왔는데도 지금 할 일이 없는 절망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있다면? 작가는 제목으로 시사한다. ‘모두가 다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가 아니라 ‘아무도 브레멘에 가지 않았다’로 바꿔 현실을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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