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연구원 연구위원

[충청매일] 지난해 청남대에 설치된 두 전직 대통령의 동상 철거에 대한 찬반 여론이 사회적 화두가 되었었다. 범죄자인 두 사람의 동상을 철거해야 마땅하다는 의견과 범죄자이지만 대통령이었던 사람으로서 역사에 기록하자는 의견이 팽팽했다. 후자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두 사람의 범죄를 인식하지 않거나 용서하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이는 두 동상 앞에 죄목을 낱낱이 기록하여 부끄럽게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최근에는 또 다른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에 대한 찬반 여론이 팽팽하다. 정치권에서도 논란이 많지만, 일반 국민으로서도 혼란스럽다. 사면의 이야기를 꺼낸 당사자도 사회적 반발을 충분히 예상했을 터인데, 그럼에도 화두를 던진 그 속내는 또 얼마나 복잡할까? 여러 추측성의 정치적 논란은 차치하고, 필자는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당사자의 해명 또는 심정은 꼭 듣고 싶다. 스스로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죄라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억울하다고 생각하는지 사면을 논하기 이전에 꼭 들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초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비전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중에 빠지지 않는 것이 통합이다. 진보와 보수의 통합, 세대간의 통합, 지역간의 통합을 말하면서 지난 것을 잊고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서 ‘용서’가 필요하다고 한다. 통합은 우리 사회가 한 단계 더 성장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왜 우리는 매년 이 말을 되풀이하는 것일까? 그렇게 중요한 것인데 왜 매번 실패하고, 또다시 외치는 것일까? 어쩌면 불가능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죄인을 용서하는 사람은 위대하고 존경받을 만하다’라는 암묵적 기준이 우리 사회에 있는 것 같다. 언론에서는 그런 사람을 위대한 사람, 큰 사람, 성인 등의 칭호를 붙여 칭찬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가 생기고, 거기에 피해자도 심리적 압박을 받는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죄에 대한 충분한 벌을 받고, 뼈저리게 반성하고 있더라도 용서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격려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칭찬이나 위대한 사람이라고 불러야 할지에 대해서 필자는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용서하는 피해자는 지속적으로 위로받고 격려를 받아야 할 대상이지, 칭찬으로 그 아픈 마음을 덮어버릴 ‘어쩌다 위인’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개인적 신념이든 종교적 신념이든, 용서하는 것은 당사자에게 매우 어렵고 고통이 따른다. 그래서 강요해서도 안 되고, 용서하지 않았다고 해서 비난받아서도 안 된다. 그 심적 고통을 감수하겠다는 결심 뒤에는 수많은 후회와 번복이 숨어있고, 이는 용서한 후에도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다. 한 번의 칭찬으로 덮어버리고 잊혀질 일이 아니다. 섣부르게 용서하고 난 후에 밀려오는 후회와 분노, 사회적 배신감은 온전히 당사자의 몫으로 남겨져 버린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통렬하게 자기의 죄를 깨닫고, 뉘우치고, 벌을 받고 나서 용서를 구할 때, 그때 용서하는 것이 피해자를 위한 진정한 용서가 된다고 생각한다. 직원들의 갈등을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빌어 섣부르게 용서하라고 말하는 사람은 피해자에게 또 다른 고통을 안겨주는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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