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번역가

[충청매일] 357년 5호16국(五胡十六國) 시대, 전진(前秦)은 용맹한 티베트계 저족(氐族)이 건국한 나라이다. 3대 부견이 황제에 오르자 처음으로 한인(漢人)들을 중용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농업을 발달시켜 나라를 부흥시켰다. 그 위세로 낙양을 정복하고 전연을 멸망시켰으며 간수지방을 공격하여 전량을 멸하였다. 이어 내몽고와 타림분지의 서역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동쪽으로 고구려까지 그 위세가 참으로 대단했다.

부견의 야망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당시 또 다른 강대국인 동진(東晉)을 정복하기 위하여 무려 90만 대군을 징집하였다. 우선 형세를 살피기 위해 자신의 동생 부융을 동진 땅 수양에 보냈다. 부융이 정세를 파악하고 서둘러 보고했다.

“지금 동진은 우리가 생각한 만큼 병력이 많지 않고 그 군대는 군량이 부족하여 굶주린 상황입니다. 서둘러 공격하면 쉽게 동진을 격파할 수 있습니다.”

이에 부견은 90만 대군의 출정을 명하였고 대군이 모두 집결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우선 수천 명의 정예기병만을 이끌고 수양에 당도하였다. 하지만 동진의 장군 사석(謝石)은 부견의 병력이 소수임을 알고 총력전을 펼쳐 정예부대를 격파하였다. 뜻하지 않은 적의 공격에 당황한 부견은 비수로 퇴각하여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90만 대군이 속속 도착하였다. 동진의 사석은 병력에서 열세를 보이자 속전속결로 싸우는 것이 유리하다고 여겨 꾀를 내었다. 사신을 보내 최후의 결전을 통보했다.

“어차피 우리 둘 중 하나는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물을 사이에 두고 싸우기는 서로가 불편할 것이니 부견 그대가 조금만 병력을 뒤로 후퇴시키면 우리가 물을 건너가 싸우겠노라.”

이는 사석이 교만한 부견을 자극하여 방심하게 하려는 계책이었다. 부견은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사신에게 말했다.

“어차피 동진은 내일이면 제삿날이 될 것이니 그 정도는 우리가 받아들이겠다.”

이때 부견의 생각은 동진의 군대가 물을 건널 때 기습하여 섬멸할 요량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군대에 후퇴하도록 명을 내렸다. 군대가 후퇴하자 갑자기 뒤에서 혼란이 일어났다. 워낙 대군이다 보니 뒤에 있던 병사들은 앞의 병사들이 패하여 후퇴하는 줄 알고 서로 먼저 도망치려 하는 바람에 아수라장이 되었던 것이다. 사석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신속하게 강을 건너 후퇴하는 부견을 향해 화살 공격을 퍼부었다. 부견은 서둘러 도망하였으나 불행히도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그러자 부견의 군대는 대오를 정비하기 보다는 도망가기에 급급했다. 결국 부견의 90만 대군은 처참하게 패하고 부견은 부상을 입은 채로 겨우 10만 병사만 이끌고 장안으로 돌아갔다. 동진은 이 전투에서 병력이 열세임에도 적의 작은 허점을 노려 집중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십육국춘추(十六國)’에 있는 이야기이다.

순수견양(順手牽羊)이란 기회를 틈타 상대의 양을 몰래 끌고 간다는 뜻이다. 이는 36계의 전략 중 하나이다. 상황이 불리할 경우에는 상대가 드러낸 아무리 작은 허점이라도 놓치지 말고 공격하면 반드시 이긴다는 의미이다. 매사 신중해야 기회가 보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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