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매일] 이런 어수선한 시절에 여느 백성집 아낙이 죽었다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을 터였지만 전직 예조판서의 며느리였다. 그러니 설렁설렁 넘어갈 수도 없었다. 충주목사는 청풍관아에 머물며 관내를 이 잡듯 뒤지며 조사를 하고 다녔다. 며칠 뒤 홍 대감집 며느리 살인범이 붙잡혔다. 그런데 놀랍게도 살인범은 홍 대감의 아들 문호였다. 남편인 문호가 자신의 부인을 독살한 것이었다. 홍 대감네 집은 난리가 났다. 홍 대감의 아들 문호는 얼마 전부터 행동이 이상해진 부인을 눈여겨 살펴오고 있었다. 그러던 중 부인이 외거노비 남출이와 몰래 만나고 있는 현장을 목격했다. 남출이는 문호와 ‘노주계’를 함께하는 계원이었다.

드문 경우이기는 했지만 상반의 구분이 분명하고 신분제도가 엄격한 조선에서도 주인과 노비가 함께 만든 계가 있었다. 이것을 사람들은 노주계라 불렀다. 본래 노주계는 주인과 노비가 힘을 합쳐 흉년 같은 어려운 역경을 함께 이겨내기 위해 만든 공동체 모임이었다. 그러던 모임이 양란 이후 신분제도의 문란과 함께 쇠락한 양반들은 노비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 무렵 신분은 양반이었지만 가난하여 땟거리를 걱정하는 집도 부지기수였고, 비록 상놈이지만 농사나 장사를 해서 많은 부를 축적한 사람도 많았다. 돈과 노동력이 없는 양반들은 이런 상놈들과 손을 잡고 공동으로 출자하여 어려움을 극복했다. 홍 대감네 역시 연고도 없는 청풍에 낙향하여 주변 도움이 없이 홀로 살아가기는 힘들었다. 피폐해진 농촌에서 농사에 필요한 인력을 구하기 힘들기도 했거니와 낙향하며 장만한 많은 농토를 부치기 위해서는 노주계에 들어가 벌레처럼 여기는 상놈들 손이라도 빌려야 했다.

노주계 일로 홍 대감집에 자주 드나들던 남출이가 문호의 부인과 눈이 맞아 정분이 났던 것이다. 문호는 다른 사람도 아닌 그것도 노비와 바람이 난 부인을 보고 치를 떨었다. 생각대로만 한다면 문호는 상놈들처럼 바람난 마누라 머리채를 끌고 동네방네 다니며 창피를 주고 싶었다. 두 연놈의 등에 북을 지우고 코뚜레를 꿰고 고삐를 매어 끌고 다니며 온 동네에 소문을 내어 평생 낯을 들고 다니지 못하도록 만들고도 싶었다. 그러나 마음 뿐 집안 체통 때문에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쇠락해가는 양반이라 해도 대감을 지냈던 지체 높은 집안이었다. 그런 집안의 며느리가 종놈과 바람이 났다고 소문이 퍼지면 패가망신할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홍 씨 집안은 다시는 일어설 기회도 잡지 못하고 영원히 몰락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속에서 천불이 났지만 문호는 이 문제를 조용하게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는 평소 소갈증으로 물을 많이 마시는 부인의 물그릇에 비상을 잔뜩 집어넣었다. 그런 후 한밤중에 시신을 끌어내 감나무에 매달고 자살로 위장한 것이었다. 홍 대감집 며느리가 죽었다는 소문이 나자 낌새를 챈 남출이는 보복이 두려워 줄행랑을 놓아 종적이 묘연했다. 문호가 오라를 받고 관아로 잡혀가던 날 홍 대감이 거처하던 사랑채에 큰불이 나 홍 대감네 큰집이 모두 타 잿더미가 되었다. 세상이 흉흉하니 별별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새 임금이 들어선 지 벌써 수년이 지났지만 백성들 살림살이는 별반 나아진 것이 없었다. 외척들 세도정치가 끝나면 금방이라도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 것만 같았지만 백성들 살림살이는 여전했다. 대궐에서의 외척들 득세는 사라졌지만 이미 수십 년간 뿌리박혀 내려오던 그들의 입김까지 몰아낼 수는 없었다. 아직도 외척들의 영향은 중앙요직은 물론 지방 관직에까지 두루두루 미치고 있었다. 이를 뒷배로 양반귀족에서 지방 관아의 구실아치에 이르기까지 결탁을 해서 백성들을 수탈했다. 하기야 부사가 바뀐다고 고을민들 살림살이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이리나 승냥이나 거기에서 거기였다. 조정에서 외척이 사라졌다고 이리가 양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백성을 뜯어먹는 양반은 저 양반이나 이 양반이나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백성들은 이제껏 뜯어먹던 양반에게 뜯기는 것이 마음도 몸도 편했다. 이제껏 뜯어먹던 양반이 바뀌면 새 양반도 또 뜯으니 백성들은 이중으로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렇게 되자 농민들은 파산하고 세금을 피해 고향을 떠나 유리걸식하는 유민들이 처처에서 속출했다.

청풍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중앙의 부패는 지역에도 그대로 전파되었다. 가뜩이나 인심은 흉흉해져만 가는 데 조 부사와 아전들 수탈은 나날이 심해져만 갔다. 관아의 세금에 허덕이고, 줄어들 줄 모르는 고리대로 자작농은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이마저도 어려운 농민들은 화전민이 되어 산속으로 들어가거나 한양으로 흘러들어가 빈민이 되었다. 농민들의 생활은 피고름이 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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