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온깍지활쏘기학교 교두

[충청매일] 오늘날 활터의 과녁이 조선시대 유엽전의 전통을 이은 것임은 지난번에 말씀드렸습니다. 이번에는 과녁 모양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과녁 모양도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여 왜 그런 모양인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조선 시대의 무과 과녁 규정은 4.6×6.6자입니다. 모양은 이렇습니다. 과녁을 가로세로 3등분(三分其廣)합니다.(“국조오례의”) 그러면 모두 9조각으로 나뉘죠. 그 중의 맨 가운데 네모를 검정으로 칠합니다. 검은 그 부분이 한복판인데, 이를 ‘관’이라고 합니다. 여길 맞히면 ‘관중’이죠. 관이 아닌 다른 곳을 맞히면 ‘변중’입니다. 이것이 유엽전 과녁의 모양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과녁 모양은 이렇게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 네모 모양 위에 가로막대가 놓였고, 훨씬 더 커진 ‘관’ 안에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졌습니다. 이 동그라미를 홍심이라고 합니다. 이게 도대체 어떤 곡절이 있는 걸까요?

전체를 9등분하여 가운데 검정을 칠하면 그 관은 과녁의 한 가운데에 있게 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아래로 조금 처졌습니다. 옛날에 무과를 볼 때 응시자가 많으면 과녁을 2개 놓고 치렀습니다. 그러다 보니 구별하려고 관 위에 一자와 二자를 써넣은 것입니다. 셋을 놓으면 三을 써넣었겠죠. 이렇게 글씨를 넣으려다 보니 그 글씨가 차지할 공간이 필요해진 것이고 그래서 관이 아래로 조금 내려간 것입니다.(“한국의 활쏘기”)

앞서 말했듯이, 해방 전후쯤 이르면 과녁 크기가 조금 커집니다. 그런데 등비로 커진 것이 아니라 검정 관이 더욱 커집니다. 옛날에는 점수제여서 관을 맞히면 가장자리 변을 맞힐 때보다 점수를 0.5푼 더 주었습니다. 그래서 조선궁도회 대회 초기에는 관중과 변중을 구별하는 도장을 따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관을 더 크게 해서 점수를 후하게 주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해방 직후의 평양 활쏘기 사진을 보면 검은 바탕에 가장자리를 흰 띠 두른 것처럼 보이게 과녁을 만들었습니다.

홍심은 1958년 한국일보사가 후원한 제1회 전국남녀활쏘기대회 때부터 등장합니다. 그때는 관이 너무 커져서 중심점 노릇을 하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만작을 하고 촉 끝을 과녁에 갖다 대고 조준하면 촉의 크기와 검정 관의 크기가 일치합니다. 그런데 관이 점차 커지면서 그 노릇을 못 하게 되었고, 그래서 새로운 표시가 필요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동그라미를 그려 넣었고, 색을 빨갛게 칠한 것입니다.(“온깍지 활 공부”)

옛날에는 이걸 두고 빨강 동그라미가 일장기를 상징한다고 하여, 일제강점기 때 항일의 의미로 넣었다고도 말했습니다만, 그건 근거가 없는 피해 의식의 산물에 불과함이, 이런 추적과 확인을 통해 간단히 해결됩니다.

과녁의 혼란도 역사가 너무 깊어서 생긴 영광(?) 때문이고, 불과 60년만에 생긴 기록 부재의 유산입니다. 반구저기(反求諸己)라는 말이 무색합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