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온깍지활쏘기학교 교두

[충청매일] 정간은 ‘조선의 궁술’에도 없는 근래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그런데도 최근 들어 정간배례를 마치 조선시대부터 있던 전통이라고 버젓이 주장하는 논문들이 나타났습니다. 기본문헌 정리나 현장 조사조차 하지 않은 채 논문을 쓴 것입니다. 이런 황당한 주장이 마치 공신력이 있는 것처럼 체육학회의 학술지에 실리고, 궁도협회 차원에서 회원인 ‘궁도인’들에게 교육을 하기도 합니다.

정간을 옹호하는 사람 중에는 심지어 다음과 같은 황당한 주장도 합니다. 즉 30년 동안 이어져 온 전통도 전통이니 현재 모습 그대로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시다면 그래야겠지요. 문제는 정간이 전국의 활터에 다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있는 곳이나 있지, 없는 곳은 없습니다. 그런 것을 전국에 두루 통하는 전통예절이라고 강변하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일입니다.

게다가 이런 궤변의 문제점은, 자신의 주장이 곧 제 발등을 찍게 된다는 점입니다. 30년 된 전통도 전통이라면, 지난 2000년 동안 정간이 없던 전통은 어떻게 하란 말씀입니까? 이걸 주장이랍시고 내세우는 분들의 궤변을 보면, 정간 옹호론자들이 얼마나 절박한 상황에 몰렸는가를 거꾸로 보여주는 일이어서 씁쓸합니다.(‘활쏘기의 어제와 오늘’)

정간 옹호론을 펼치는 사람들이 말끝마다 인용하는 것이 천양정의 규약입니다. 거기에 정간이라는 말이 나온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서울이라는 ‘말’과 ‘땅’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서울은 때로 서울시 땅이 아니라 ‘수도’를 뜻하기도 합니다. ‘수도’와 ‘행정구역’은 다릅니다. 이런 간단한 이치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천양정 규약의 정간이 오늘날의 정간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한 탓입니다. 천양정의 정간이 오늘날의 정간이라면, 정작 천양정에는 왜 정간이 없을까요? 천양정의 정간은 어른들이 앉아 쉬던 ‘공간’이고, 오늘날의 정간은 ‘널빤지’입니다. 어른들도 없는 들판에다 그 널빤지를 말뚝 박아놓고 절한다면 온 세상이 웃을 일입니다. 이걸 구별 못 하고 널빤지에다 갖은 이념을 덧붙인들, 널빤지가 공간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정간은 1977~78년 무렵에 전라도 일부 활터에서 발생한 현상이고, 지나친 강제성 때문에 2003년에는 도끼에 찍혀 박살 난 사건도 있었습니다.(‘국궁논문집’) 전라도에서 발생한 정간이 전국으로 어물쩍 퍼져가던 중, 26년만에 강렬한 저항에 맞닥뜨린 것입니다. 결국, 구성원들의 합의를 보지 못한 사이비 예절을 아직도 붙잡고, 영문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강요하려는 세력들이 활터 곳곳에서 권토중래를 꿈꾸는 중입니다. 이미 도끼에 찍힌 정간을 그럴듯한 예절로 포장하여 정당화한들, 조금만 지나면 세상의 조롱거리만 될 뿐입니다. 활터의 예절은 ‘조선의 궁술’에 있는 등정례 하나로 족합니다.(‘활쏘기의 나침반’)

우리 활의 앞날은 밝습니다. 가장 우수한 활쏘기여서 인류가 공동으로 누려야 할 유산입니다. 따라서 활터의 미래는 세계화입니다. 그것에 거치적거리는 어떤 악습도 우리의 전통으로 허용할 수는 없습니다. ‘정간’과 ‘궁도’는 우리 활의 미래를 위해 가장 먼저 걷어내야 할 악습이자, 망령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해괴망측한 것들이 활터의 장래를 먹구름처럼 찍어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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