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온깍지활쏘기학교 교두

[충청매일] 경기도는 수도 서울을 에워싼 곡창지대입니다. 주로 벼농사를 많이 짓죠. 가을걷이까지는 몹시 바빠서 눈코 뜰 새가 없지만, 1년 농사가 끝나면 텅 빈 논으로 지게관을 지고 나가서 활쏘기했습니다. 당연히 동네별로 시합이 붙어서 겨우내 풍성한 활쏘기 풍속이 이루어졌습니다. 인천의 경우 지금은 활터가 10여 곳인데, 해방 전에는 무덕정 한 곳만이 활터 건물이 있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들판에서 지게관이나 솔포를 걸고 활을 쏘던 활터들이 점차 건물을 들이면서 자리 잡은 것입니다.

만약 정간이 해방 전부터 있던 풍속이라면 이런 활터에서는 허허벌판 어디에 정간을 걸어둘까요? 정간이 얼마나 황당한 허구이며 허무맹랑한 예절인가를 이런 간단한 사례만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같은 곡창지대인 전라도 지역으로 가보겠습니다. 정읍, 광주, 임실, 오수, 구례, 남원, 곡성 같은 곳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곡창지대입니다. 충남과 경남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곳에는 옛날부터 양반들이 활터를 스스로 세웠습니다. 그것은 임진왜란 이후 유사시 지역을 방어하려는 방편이었습니다. 고을의 젊은이들에게 활쏘기를 익히게 해서 왜적이 노략질하러 올 때를 방비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지역에는 결속력이 강한 사계가 만들어졌고,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활터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관청과 연계된 경우가 많았고, 현감이나 군수가 활터를 직접 만들고 이끄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도 호남과 충남의 유서 깊은 활터에서는 아예 신주를 활터에 모셔놓고 매년 고사를 지냅니다. 고사를 지낼 때는 활터의 가운데인 정간에 제수를 진설하고 절차를 진행합니다. 정간이란 동간과 서간 사이인 건물 가운데 칸을 말하는 옛 건축 용어입니다.

이런 풍속이 있는 지역의 분포를 보면 경상남도와 전라도, 그리고 충청남도입니다. 특히 해안가를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에 이런 활터가 널리 퍼져있습니다. 왜 이럴까요? 츠쿠바 대학 이찬우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이런 지역이 바로 왜구의 노략질 대상 지역이었다는 것입니다. 배를 이용하는 왜구들은 해류를 따라 이동하게 되고, 구로시오 해류는 쓰시마 섬을 지나 동해안으로 흘러가고 그 지류가 부산 앞바다에서 갈라져 남해안을 따라갑니다. 따라서 왜구가 노략질하러 이동하는 코스도 이 해류를 따라서 충남의 해안가에 이르고, 결국 그런 해안가를 바탕으로 활터가 점점이 흩어져있는 형국입니다. 활터가 왜구의 노략질에 대응하는 조선 시대의 훈련 거점이었음을 이런 연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지역의 활터는 관청과 일정한 관계를 맺고 지역 유지들의 강력한 지원과 개입을 통해 유지됩니다.

그런 관행과 전통이 활터에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활터에서 옛 대표들의 고사를 지내며 기념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요즘의 정간배례는 정체 모를 망령에게 날마다 절을 올리는 것입니다. 우리 문화에 이런 황당한 짓은 없습니다. 어느 종갓집에서도 학생이 학교 간다고 날마다 신주 앞에 가서 절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정간배례가 해방 전부터 있던 것이라면, 오히려 일제강점기 때 일본 천황이 계신 동쪽을 향해 90도로 허리를 꺾어 절하던 궁성요배가 그것의 원형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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