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청주예총 부회장

[충청매일] 마을 어른들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탑선리 고향집은 백두산 적송(赤松)을 실어다가 80년 전에 지었다고 한다. 못을 사용치 않고 목재를 짜 맞춘 솜씨는 가히 탄복할만하다. 안방과 가운데 방 2칸, 윗방이 2칸, 도합 5칸 장방에다가, 그 방을 감싸는 ‘ㄱ’자 모양의 대청마루는 가히 걸작이었다.

윗방에서는 “천지지간, 만물지중, 유인최귀”라며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외우는 낭랑한 소리가 지금도 쟁쟁하다. 심원국민학교 교사를 신축할 때는 임시됨으로써, 나도 4학년 때는 가운데 방에서 수업을 했다.

원래 우리 집은 ‘또랑갓집’이었다. 7남매나 되는 우리 집에 큰 형이 결혼하는 등 식구가 늘면서 이집으로 이사를 왔다. 한 때는 열다섯 식구가 이 집에서 함께 살았다. 거기에 더하여 사랑방에는, 동네 처녀 총각들이 고구마 통가리에서 고구마를 깎으며 ‘왁자지껄!’하니, 희미한 석유등잔 아래서 ‘앵두나무 처녀’ 노래 가락에 겨울밤이 지새는 줄 몰랐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어 좋다! 참 좋다! 재미있게들 놀아라!”라며 만면에 미소를 지으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시절이 우리 집안의 최전성기였던 것 같다. 식구가 불어나는 것과 비례하여 재산도 엄청나게 불어나는 등 승승장구 만사형통이었다.

7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우리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하더니, 80년대가 접어들면서 팔순(八旬)의 부모님 부분이 이 집을 외롭게 지켰다. 21년 전에는 불의의 사고로 6개월을 누워 계시다가 아버지는 세상을 뜨시면서 “병연아! 내 죽거들랑 네가 이 집을 지켜라!”라고 유언을 하셨다. 

이제는 이 큰 집을 지키는 것이 어머님 몫이 되었다. 어쩌다 내가 집을 들리면, 어머님은 윗방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쓸쓸히 웅크리고 누워 계셨다. 생각하면 눈물부터 앞을 가린다. 그러던 어머니조차 세상을 뜸으로써 빈집이 되었다. 그래도 막내 ‘병선’이 부부와 같이 훌륭한 형제가 있어서 불행 중 천행(天幸)이다. 막내이면서도 제사를 자청함으로써, 명절 제사 때만 되면 형제들은 이곳으로 모여서 혈육의 정을 다질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5년간의 중국생활을 청산한 나는, 21년 전 아버지와의 약속을 이행코자 지난 3월에 귀향하여, 그 동안 아껴 모아둔 돈 ‘에쿠스’차 한 대 값을 투입하여 집을 수리하기 시작하였다. 당초 건축할 당시의 원형은 그대로 보존한 채로, 황토방, 편백나무 벽, 태크 마루, 지붕, 앞 처마 3m 확장, 와이파이, 에어컨 설치 등으로 도시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췄더니, 손자들이 너무 좋아 한다.

손자 종명이, 외손자 승기와 승원이는 우리 부락 친구들과 어울려 너무나 행복해 한다. 이제 우리 집은 동네 아이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7∼8명이 어울려 방 세 칸을 뛰 놀며 떠들썩한다. 그저께는 손자들과 동네 얘들을 데리고 점심을 사줬다. 고기가 맛있다고 어찌나 잘 먹는지! 보기만 해도 행복하다.

문뜩 50년 전 사랑방에서 ‘앵두나무 처녀’를 부르며 겨울밤을 지새웠던 동네 처녀 총각들! “어 좋다! 참 좋다!”라며 웃음을 잃지 않으셨던 아버지가 떠오른다. 내 손자만 손자인가!? 온 동네가 한 가족이요, 산하대지가 내 집이라!

고목생화(枯木生花)라! 마른나무에서 꽃이 피고 있다. 입가에는 미소가, 마음에는 평화가, 넉넉하셨던 아버지! 지금은 동네 어린이들의 사랑방이 된 고향집을 보면서, ‘고목생화하는 꿈’을 소박하게 기대해 본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