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청주민예총 사무국장

[충청매일] 그동안 많은 파업 보도를 접했다. 노사 합의안을 위한 파업부터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파업에 이르기까지 개인과 집단의 이익을 위한 소수자들의 투쟁이 파업이었다. 집단행동을 통해 약자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이 서로 손잡고 함께 싸운다면 가능한 일들이 많다. 그리하여 노동조합이 있는 것이며, 단체가 있는 것이다. 대기업이 노조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피지배자가 소유주 또는 절대 권력자의 말을 듣지 않고 반기를 든다면, 경영에 치명적일 것이다. 그보다 경제적 손실은 더 클 것이다. 그보다 사소한 일에 신경 쓰고 머리 아픈 일을 만들고 싶지 않을 것이다. 제거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제거할 수 있는 권리. 그리하여 독재가 등장하고 힘과 무력으로 약자를 탄압했던 것이다.

현재도 노동력을 착취하고 인권을 유린하고 강자 편에 서서 약자를 괴롭히는 무리가 존재한다. 예술인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권력 유지의 저항 세력을 제거하려 했던 것처럼 말이다. 내가 근무하는 바로 앞이 시청이다. 그렇다 보니 피켓을 들고 확성기를 들고 거리로 나선 이들을 자주 접했다. 많은 사연을 싣고 많은 이들이 다녀갔다. 너나 할 것 없이 소위 민중가요를 부르며 목소리를 모았으나 액션은 오래가지 않았다.

몇 년 전, 시청 앞 공원에는 오래도록 천막이 설치되고 긴 싸움을 시작한 이들이 있었다. 더위와 추위, 봉쇄와 철거의 시련을 견딘 긴 투쟁이었다. 다행히 그들의 뜻은 관철되었다. 거리의 절실함은 그런 것이었다. 오롯이 자신이나 몇몇 이익이 아닌 사회의 변화가 요구되는, 끝내 변해야 좋은 세상이 오리라는 믿음이 있어야 버틸 수 있는 것이다. 까마득히 높은 철탑에 오르는 이들처럼, 목숨 걸고 싸울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예술인은 무엇을 위해 파업을 선언할 수 있을까. 예술인의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은 세상에서 예술 활동을 하는 이름 없는 가난한 예술인들은 어떤 목소리를 내야 하는가. 집단이기주의로 밖에 보이지 않는 의사들의 파업처럼, 예술인의 파업은 다를까. 파업이란 대항할 무기가 있어야 힘이 있는 법인데, 예술인은 무기가 없다.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파업에 들어간 의사들의 무기는 막강하다. 대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의사가 되기 위해 힘든 시험을  통과하고 합격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겠는가. 그러니 특권 계층으로 억대 연봉은 당연한 것이며, 개나 소나 의사 되는 일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예술은 대체 가능한가. 누군가 활동을 접고 파업에 들어간 들 누가 측은지심을 보낼 것이며, 예술 없는 사회를 불안해하겠는가. 유행가 가사처럼 시대에 뒤처지면 잊히고 마는 것이 예술 아니던가. 그러므로 파업할 무기도, 힘도, 돈도, 권력도 없는 예술인을 위한 정책은 지원 개념이 아닌 복지 개념으로 바뀌어야 한다. 예술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술에 누가 지원하고, 손을 내밀겠는가. 이런 시선으로 예술을 바라보는 이상, 예술은 씹다 뱉은 단물 빠진 껌에 불과하다.

예술인들이여! 예술인의 권리와 예술적 가치를 위하여, 적선하듯 던져주는 지원금을 거부하기 위하여, 예술인의 자존심을 버리고 돈과 권력 앞에 굽신대는 이를 처단하기 위하여, 예술 하며 밥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하여, 예술이 사회의 진보를 이끄는 날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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