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충청매일] 잠시 길을 잃었다가 절벽을 타고 오르니 산성이 나왔다. 이곳에서 울금바위까지 평탄한 성벽 위를 걸었다. 울금바위 가까이 가니 성의 윤곽이 뚜렷하게 보였다. 성은 전체적으로 남쪽보다 북쪽이 넓은 사다리꼴 모양을 하고 있고 내외 석축의 방법으로 쌓은 견고한 석성이었다. 1천500여 년 전 삼국시대, 아니면 가야시대에 쌓은 산성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비로운 일이다.

울금바위에는 굴이 몇 개 있는데 원효굴이라 이름한 곳도 있고, 복신굴이라 이름한 곳도 있다. 원효굴은 원효의 수도터일 테고 복신굴은 복신이 숨어 백제를 부흥시키려 했던 곳일 수 있다. 원효굴은 입구가 좁고 굴이 깊지 않았다. 복신굴은 입구가 넓고 굴 안이 매우 넓었다. 복신굴로 알려진 매우 큰 굴에서 가파른 길을 내려오니 개암사이다.

부흥백제와 운명을 함께한 복신은 매우 불우한 왕족이다. 의자왕의 사촌동생으로 왕이 660년 웅진성에서 항복하자 대련사 도침대사와 백제 유민을 모아 백제의 부흥을 꾀했다. 그는 당나라 장수 유인궤를 위협하고 웅진성을 포위 공격하기도 하는 등 세력을 뻗치기도 했다. 그러나 내부의 불화로 도침을 죽이고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으로부터 살해 되어 비운의 최후를 마쳤다. 복신의 죽음으로 부흥백제도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개암사 마당에서 대웅전을 바라보니 절집 지붕 위에 울금바위가 마치 바위 문이 열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개암사라 했는지 모른다. 바위 문이 열리고 부처님의 자비가 넘쳐흐를지도 모르는 일이다. 대개 백제부흥운동에 관련된 산사의 금당은 극락보전에서 아미타부처님을 모시고 백제 유민과 부흥군의 명복을 비는데 이곳 개암사는 대웅보전이 큰법당이다.

부안 사람들이 이곳을 부흥백제국의 왕성인 주류성이라고 한다. 그러면 왕성이라고 할 만한 건물이 있어야 한다. 일본에 가 있던 왕자 부여풍을 모셔 와서 부흥백제국의 왕으로 옹립하였으니 건물은 당연히 왕궁의 규모를 지녀야 한다. 또한 최후의 격전지로서 토굴에서 삼천의 군사와 유민이 몰살당한 전설에 근거하여 그 증거인 토굴도 있어야 한다. 또 복신과 도침의 전설에 맞는 사찰도 있어야 한다. 이런 여러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성은 아직 찾지 못한 것 같다.

주류성이라고 가정하는 7개의 산성을 지금까지 답사한 결과를 돌이켜 보면 성의 규모나 주변 환경 등을 고려하여 예산의 임존성이 부흥백제의 왕성인 주류성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고 운주산성이 최후의 격전지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본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임존성의 규모가 크고 건물지가 많으며 남문지 바로 아래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인물인 도침대사가 세운 대련사라는 절이 있다. 그리고 부여 도성에서 멀지 않아 백제 유민이나 군사들이 흑치상지 장군을 따라 운집했을 가능성도 높다. 또한 운주산성 부근의 비암사에는 백제의 명문거족이었던 천안 전씨와 관련된 불비상이 발견되었고, 연기지역의 다른 산사에서 불비상이 발견되었던 점을 들 수 있다. 불비상은 백제 역대 제왕과 유민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는 소망이 담겨 있다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부흥백제 역사는 최후의 왕궁지가 어디인지 잃어버릴 정도로 삼국의 역사에서 철저하게 매몰되었다.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일이다.

우금산성 답사를 끝으로 산성산사 찾기 연재를 마치고자 한다.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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