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충청매일] 부안 사람들은 우금산성을 틀림없는 주류성이라고 한다. 그 근거로 백강전투가 이곳 변산 앞바다에서 이루어졌다고 학자들이 고증하고 있다. 그러나 서천에 가면 건지산성이 주류성이라고 하면서 금강하구인 기벌포를 백강전투의 현장이라고 소개한다. 기벌포 전투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676년 신라가 당나라 군사를 격파하여 당나라 세력을 삼한에서 완전히 몰아낸 전투라 하기고 하고, 663년 부흥백제와 왜의 연합군과 나당연합군의 전투로 왜군이 완패함으로써 부흥백제의 최후를 맞이하게 된 백강전투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은 이 두 전투가 별개의 전투인데 663년의 백강전투에 관한 이야기는 부흥백제 멸망 이후 역사 속에서 묻혀버린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백강이 어디인가는 의문이지만 금강을 백강이라고 한다면 기벌포 전투가 바로 백강전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백강전투는 부흥백제군과 왜의 연합군과 나당연합군의 전투로 보고 있는 여러 문헌에서 조사한 내용을 토대로 그 개요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부흥백제군 세력은 주류성으로 추정되는 부안 우금산성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661년 9월 부흥백제군의 도침대사와 복신이 왜에 건너가 있던 왕자 부여풍에게 요청하여 왜의 지원을 받아 함선 170척에 군사 만여 명 거느리고 귀국하였고, 662년 3월 왜의 부흥백제 지원군 2만7천명이 가미쓰케노 기미와카코, 아베노 히라우의 지휘로 백강에 들어왔으며, 663년 8월 왜군 1만여 명이 보충되었고 함선이 1천여 척이나 되었다.

나당연합군은 당나라는 유인궤의 군사 1만7천명과 문무왕과 김유신의 신라군이 합세하였다. 당시 왜 수군과 당 수군 및 신라군의 동태를 보면, 663년 8월 13일 풍왕이 왜군을 백촌에서 맞이하였고, 같은 달 17일 나당군은 주류성을 포위하며 공격하였다. 당 수군은 7월 17일부터 부안진성에서 진을 치고 지형과 조류를 조사하고 전략을 짰다. 8월 13일에 도착한 왜 수군이 백촌강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급속히 빠지는 썰물을 모르고 있다가 배를 돌릴 겨를도 없이 배들이 펄 속에 처박혀 움직일 수 없었다. 이때 당군은 화공을 퍼부어 왜함선 400여 척을 불태웠다, 간석지의 넓은 습지는 물이 빠지면 갯벌이 되기 때문에 배를 돌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왜군들은 배에서 뛰어 내려 걸어 가려했지만 질퍽한 갯벌을 빠져 나가지 못하고 죽임을 당한 것이다. 살아남은 병사들도 주변의 방책지로 이동을 하였으나, 나당군의 공격으로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왜병 선단은 전군을 셋으로 나누어 4번 선제공격하였으나 4번 모두 실패하였고, 1천여척의 함선 중 400여 척이 불에 타고, 병사 만여 명 전사하고, 1천여 필의 병마가 죽었다.

이로써 백강전투는 부흥백제가 최후를 맞는 정점이 된 것이다.

백강전투가 이렇게 나당연합군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기 때문에 부흥백제의 운명은 663년 8월로 볼 수 있다. 일본서기에는 백제의 멸망을 660년으로 보지 않고 663년으로 보는 것도 풍왕이 백제의 마지막 왕이고 백강전투가 백제의 최후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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