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청주예총 부회장

[충청매일] 오늘은 6·25, 70주년! 10여년 전 불의의 사고로 86세의 일생을 마감한 장모님의 고고(孤高)한 뜻을 기려 비문(碑文)을 아래와 같이 새겼다.

“한 많은 세상에, 한없는 세월을/ 한으로 살다가, 한을 풀지 못하고/ 돌아올 기약 없는 저승길로 떠난 女人이! 여기에 자리하고 있다./ 6·25가 한의 씨앗이 될 줄이야/ 스물일곱 살부터 집을 떠난 낭군님을!/ 일구월심 오매불망 무남독녀 ‘영순이’와/ 오늘이나 내일이나 기다렸던 60년!/ 유명(幽明)을 달리하고 10년이나 흘렀어도/ 한 여인의 통곡이 한의 메아리가 되어 퍼진다.”

경부고속도로 남청주IC에서 출발해 대전을 지나 충북의 최남단 영동IC까지 소요되는 시간이 40분! 영동IC에서 직진해 2분 정도 거리에 율리마을! 도로 왼편 밭가에 ‘주목’으로 병풍을 이룬 무덤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살아서 1천년, 죽어서도 1천년’이라는 주목(朱木)은 장모님의 고고(孤高)한 기품 상징하기에, 돌아가신 해에 무덤을 쓰면서, 가장자리에 나무젓가락만한 묘목 한아름을 심었다. 

주인공(안갑녀)은 매곡면 천덕리 ‘순흥안씨’집안 3남1녀 4남매의 첫째로 태어나서 ‘갑녀(甲女)’라고 명명(命名)하였다. 부친 ‘원상(元相)’은 후덕한 선비로서, 사랑방에는 과객(過客)과 식객(食客)이 쉴 새 없이 찾아들어, 부엌 아낙네 서너 명이 밥을 해대느라고 사시사철 여념이 없었다고 한다. 

19세에 ‘성주이씨’ 집안 5형제 중 둘째에게 이곳으로 출가하였다. 한 살위인 20세 신랑 ‘백열’은 훤칠한 외모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따뜻한 인품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23세에 금지옥엽 ‘영순이’가 생겨나, 행복한 보금자리를 이룰 수 있었다.

우익과 좌익,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등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김일성의 적화야욕이 빚은 6·25가 한(恨)의 씨앗이 될 줄이야! 신랑 ‘백열’은 용산면 인민위원회에 가담한 것이 화근이 되어, 퇴각하는 인민군을 따라서 월북한 것이 생이별의 단초가 되었다. 교사로 재직 중이던 동생 ‘삼렬’은 육군 장교로 입대해 전선에 참여함으로써, 형제간 남북의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천행이랄까! 말년에는 사랑스런 사위를 얻음으로써, 사위사랑 장모사랑 오순도순! 사위만을 생각하고, 사위만을 의지하며 지낸 34개성상! 사위가 영동농공고 교장과 영동교육장으로 발령받아 교장사택과 교육장관사에서 단 둘이 지냈던 그 시절이! 일생 중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자. 사위로서 효도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반대로 외손자(사위의 ‘경남이’)를 잃음으로써, 눈물로만 지새던 외할머니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사위가 죄스럽다. 그래도 함께한 34년만은 행복한 34년이었다.

아! 동족상잔의 6·25. 70주년! 70년이란 세월이 시대를 많이 변모시켰지만, 김일성 일가 3대 세습을 위한 인권유린과 탄압은 가혹하기만 하단 말인가?

한 여인의 피맺힌 한이, 유명을 달리한 오늘까지도! 6·25. 70으로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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