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충청매일] 성문의 양쪽 벽에 흐릿하게 축성 책임자의 이름과 소속을 새겨 넣은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대부분의 읍성에 이런 표식이 남아 있다. 공남문 누각에 올라서 동쪽으로 나가보면 성첩이 있다. 이른바 성가퀴라고 한다. 조선 순조 때 훼손된 것을 1970년대 공남문을 복원하면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성첩에서 포를 쏠 수 있는 구멍을 보면 몇 개는 평평하게 또 몇 개는 아래로 비스듬하다. 아래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얼마나 슬기로운가.

공남문에서 연못으로 내려가는 길도 석축했다. 이곳에서 성안 마을이 다 보이고 동장대(보화루)가 슬쩍 보인다. 마을 안에 있는 연못을 다만 성내의 용수를 위한 것이라고만 말할 수 없다. 조금만 더 생각하면 연못도 성벽의 일부이다. 성 밖에 운하를 만들어 적의 침입을 막는 해자(垓字)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인도 암베르성은 둘레가 14㎞나 되는 대규모 테뫼식 산성이다. 이 성에도 상당산성의 연못과 같은 인공저수지가 있다. 암베르성에는 약 7천명의 군사와 민가가 있었다는데 인공저수시설은 이들의 용수를 충족시키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연못은 석성의 일부로서 용수도 충족시키는 일석이조의 기능을 한다. 상당산성에는 이 외에도 연못이 또 하나가 있었다고 하니 아마도 물의 용도를 달리했을 것이다.

문루에서 내려와 다시 성문 밖으로 나가면 아주 작고 아담한 비가 하나 서 있다. 구룡사 사적비이다. 성 안에 있다가 폐사된 사찰 구룡사의 사적을 적은 비이지만 마모되어 읽기는 어렵다. 구룡사는 1720년 충청병마절도사 이태망과 상당산성을 책임진 병마우후 홍서일이 성 안의 군영을 건축하면서 창건했다고 한다. 구룡사는 전각의 총 규모가 66간이라고 하니 그 크기를 짐작할 만하다. 극락보전이 있었다는 것은 성안이나 성 아래에 있는 사찰의 공통점이다. 구룡사 이외에도 규모가 비슷한 남악사와 좀 작은 당대사가 있었다니 성의 규모와 당시의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하긴 3천500명의 군사와 승군이 이곳에 주둔하면서 성을 보존하고 청주를 수호했다고 하니 청주읍성의 배후 산성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다.

공남문에서 성벽 위로 난 길을 걸으면서 성을 돌아본다. 상당산성은 외축내탁법으로 축성했다. 돌로 외벽을 쌓고 안에서 흙과 자갈을 다져 넣는 방법이다. 대부분 읍성은 이런 형식으로 쌓게 되어 있다. 이유는 외벽은 적의 공격을 어렵게 하고 내벽은 특별히 오르내림 시설이 없이 아무 곳으로나 군사와 백성이 오르내릴 수 있도록 비스듬하게 쌓는 것이다. 읍성이 고스란히 남은 해미읍성이 그렇고, 일부만 남아있는 홍주읍성이 그렇다. 서천 한산읍성은 좀 달라서 남은 일부구간은 내외협축석성이었다. 상당산성은 안쪽이 비스듬한 흙으로 되어 있다. 공남문에서 서남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성첩의 모습이 확실하게 남은 성벽을 발견할 수 있다. 본래의 성벽에서 약 세로 1.8m, 가로 2.5m 정도 장방형으로 밖으로 튀어 나갔다. 치성이다. 이곳에 성첩이 있고 포문이 있다. 치성 성가퀴에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 아래 분명 토성으로 보이는 언덕을 발견할 수 있다. 분명 토성이다. 저 흙을 파헤쳐 보면 그 속에서 백제의 유물이 쏟아져 나올지 모른다. 백제시대에 최초에 쌓았다는 토성일 것이다. 조선 숙종 때 개축하면서 토성을 허물어 내고 그 자리에 석성을 쌓은 것이 아니라 토성 위에 석축했을 것이다. 산성 전체를 돌아가면서 보면 대부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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