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온깍지활쏘기학교 교두

[충청매일] 활터는 마치 저수지나 댐 같습니다. 조선의 모든 무예가 이리로 흘러들었다가 다시 현재로 이어져옵니다. 1929년에 우리 활쏘기를 집대성한 책이 나옵니다. ‘조선의 궁술’(조선궁술연구회)이 그것입니다.

이 책의 뒤편에는 활터에서 쓰는 용어를 정리했는데, 거기에 보면 이상한 낱말들이 나옵니다. ‘소살판, 살판, 대살판’입니다. 즉 활터에서는 1획인 10순(50시)을 쏘아서 15시를 맞히는 한량은 소살판이라고 불렀습니다. 아울러 20시를 맞히면 살판, 25시를 맞추면 대살판, 30시를 맞히면 시수꾼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살판’은 ‘살판났다.’고 할 때의 그 살판입니다. 씨름판에서도 우승을 하면 두 손을 번쩍 치켜들면서 환호하죠. 그게 바로 살판의 모양입니다. 살판이란 남사당 용어입니다. 공중제비를 넘으며 펄쩍펄쩍 뛰는 사람을 살판이라고 합니다. 이게 활터 용어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활터에서 20발 맞힌다고 펄쩍펄쩍 뛰지는 않습니다. 이런 용어가 있다는 게 정말 이상합니다. 이건 분명히 다른 문파의 용어가 활터로 흘러든 게 맞습니다. 벌써 남사당에서 쓰는 말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용어는 어느 문파에서 흘러들어온 말일까요? 조선시대의 어느 무술 문파가 기쁨을 못 이겨 승리 후에 이렇게 공중제비를 뛰었을까요? ‘조선의 궁술’은 당시 서울 한량들이 정리한 책입니다. 서울 풍속을 중심으로 엮였습니다. 서울에서 이런 동작을 한 무술 문파를 알아보면 될 것입니다. 언뜻 떠오르는 게 있습니다. 바로 태껸이죠. 서울 황학정이 있던 자리는 웃대 태껸의 본거지였습니다. 지금의 황학정 바로 뒤 인왕산 기슭에 감투바위가 있고, 황학정에서 활쏘기를 하며 말년을 보내던 송덕기 옹이, 찾아오는 젊은이들에게 태껸을 가르쳤습니다. 지금은 그의 제자들이 도기현을 중심으로 결련태껸모임을 결성하여 결련태껸을 이끌고 있죠.

묘한 것은 충주 태껸의 명인 신한승도 충주에서 활쏘기를 했던 한량이라는 점입니다. 서울 태껸의 송덕기도 충주 태껸의 신한승도 모두 활량입니다. 이런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문화사의 시각으로 보면 한결 또렷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활터 사람들의 존재가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과와 함께 사라진 조선의 풍류문화의 주역들입니다. 지배층으로부터는 보잘 것 없다고 도외시 당하던 그들의 문화가 활터로 흘러들어 이렇게 면면히 이어져온 것이라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활터는 활쏘기만 하는 곳이 아니라 조선시대의 문화를 담당했던 계층이 깃들었던 둥지입니다. 이들은 전국 활쏘기 대회를 통해서 네트워크를 형성했고 해마다 시즌이 되면 전국 각지의 활터에서 모여서 자웅을 겨루며 호연지기를 기르고 자신의 핏속으로 흘러오는 전통 문화를 오늘날까지 이어왔습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은 곳에서 몸속으로 흐르는 거대한 문화의 잠력을 1980년대까지 이어왔습니다. 이것이 활터가 전통 무예의 저수지라는 말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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