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충청매일] 호두나무는 대를 이어 사랑을 담고 있다. 그 사랑은 9월이면 나의 손을 까맣게 물들인다.

‘만지작만지작’ 청설모 한 쌍이 호두나무 가지 사이를 오가며 호두를 만져보고 있다. 아기들 먹거리를 구하러 왔나본데 아직은 설익었는지 만져보기만 하고 돌아간다. 그런 청설모에게 호두나무가 조금 더 기다리라는 듯 가지를 흔들며 배웅한다.

호두나무는 약간의 매캐한 냄새가 난다. 평소엔 느껴지지 않지만 비가 내리는 날이나, 바람이 불면 그 냄새가 코에 와 닿는다. 그래서인지 병균도 해충도  침입하지 못한다. 나는 먹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런데도 청설모는 맛있다고 아이들 몫까지 챙긴다.

자연은 머물러 있지 않고 쉬지 않고 순환한다. 깊은 가을로 접어들면 호두알을 익게 한다. 옛날 할머니들은 사내아이 사타구니를 보며 호두알이 달렸다 했다. 석류가 익으면 입을 벌려 속의 빨간 알을 보여 주듯 호두알도 녹색 외과피를 벌려 갈색의 내과피를 보여준다. 밤도 고슴도치 같은 껍질을 벌려 알밤을 땅으로 내려 보낸다. 아마 가을은 벌림의 계절인가 보다.

성질 급한 사람은 호두 먹기가 힘들다. 외과피를 벗기면 딱딱한 내과피가 나오고, 내과피를 돌이나 망치를 이용해 벗기면, 호두알이 나오는데 또 노란껍질로 쌓여있다. 이를 벗기고 하얀 속살이 드러나면 먹어야 한다. 고소하고 맛있다. 지루한 기다림을 날려버리는 황홀한 맛이다. 급하다고 노란 껍질째 먹으면 떫으니 그야말로 고진감래이다.

호두는 대추, 밤, 감처럼 쉽게 만날 수 있는 열매는 아니다. 마트에서 판매하는 데가 그리 많지 않다. 맛이 없어서일까, 찾는 사람이 없어서일까. 만나기가 쉽지 않다. 대추나 밤은 닭백숙에 들어가 소비가 많은 반면 호두는 일반적 요리에 사용되는 일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땅콩처럼 간식으로 주로 사용되는 견과류이기 때문인가 보다.

호두는 우리 건강에 꼭 필요한 견과류이다. 인간의 뇌와 구조가 비슷하고, 불포화 지방산을 포함하고 있어 두뇌 건강과 피부 미용에 좋은 식재료라 한다. 동의보감에서도 기관지가 약한 사람에게 좋고 폐의 기운을 모으며 천식을 다스린다고 했다.

호두는 고려 충렬왕 16년 영밀공과 류창신이 원나라에서 가져와 천안 광덕사에 심어 전파되었다고 전해진다. 나무 특성상 접목이 잘 되지 않아 주로 씨앗을 심어 실생묘로 번식시켜 심겨졌다고 한다. 그래서 광덕사가 시배지라 불리고 천안 명물 호두과자가 탄생하게 됐나보다.

해마다 9월 말경이면 내 손은 까맣게 물든다. 오래 전 내게 준 아버지의 선물이다. 올해는 조심해야지 하면서도 호두를 따고 온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손이 까맣게 물들어있다. 창피하여 손을 내밀기 싫지만 어느새 잊고 손을 내민다. 자랑스러운 아버지의 선물이라 그런가 보다.

아버지는 아들 손자를 생각하며 호두나무를 심었다.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아들 손자를 생각하며 심었다. 몇 십 년이 흐른 지금 아들과 손자, 증손자까지 맛있는 호두를 먹으며 건강한 겨울을 따뜻하게 지내고 있다. 까맣지만 예쁜 손을 보여주며 아버지의 고마움을 이야기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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