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철
콩트작가

[충청매일] 보름달이 두둥실 높이 떠올랐다. 계수나무도 보이고 떡방아 찧는 토끼의 형상도 예전과 다름없다. 하지만 저 달을 바라보며 ‘토끼다’ ‘아니다’라며 우기던 친구들의 모습은 간 곳 없다. 돌아 갈 수만 있다면 돌아가고 싶은 유년 시절, 그날도 오늘처럼 밝은 달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웃마을에 살던 친구가 더벅머리에 기타를 메고 찾아왔다.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당시는 머리를 기르고 기타나 들고 다니면 불량 청소년쯤으로 생각했으니, 그만큼 생활이 어려웠고 취미생활은 생각도 못 하던 시절이었다.

친구와 나는 어른들 눈을 피해 마을 앞을 가로질러 흐르는 강가 자갈밭으로 나갔다. 넓지 않은 강은 달빛을 받아 마치 은비늘을 뿌려놓은 것처럼 반짝였다. 서툰 솜씨로 기타 치며 나에게 들려준 노래가 “비 내리는 고모령”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박자나 음정은 관심도 없이 그저 호기심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지 싶다. 우리는 그때 막 사춘기를 지날 무렵으로 인생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인생을 논하고,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현실을 비난하며 폭발 직전의 생활을 계속해오고 있던 때였다.

마치 우리가 처한 불우한 현실에 분풀이라도 하려는 듯 납작한 돌을 주워 은비늘을 깔아놓은 것처럼 반짝이는 강물에 마구 던졌다. 우리들의 마음과는 달리 여러 개의 동그라미를 그리며 멀어져가는 모습은 달빛에 반사되어 더욱 아름다웠다. 

한가위 명절에는 면 단위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가요 콩쿠르를 많이 열었었다. 대회가 열리면 하루에 끝나는 게 아니라 3일씩 걸렸다. 보통 예심이 이틀 정도 걸렸는데 신청할 때 돈을 내고 예선을 통과하면 또 돈을 내야 했다.

가요콩쿠르에서는 수상자에게 값싼 상품을 주었다. 그것도 1~3등까지는 어느 정도 내정이 되어있고 나머지 4~7등은 알아서 주던, 그야말로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는 것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었다.

편모슬하에서 자란 내성적인 친구는 가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인근 마을에서 열리는 콩쿠르가 있으면 꼭 출전했다. 나는 어두운 밤길을 20~30리씩 걸어가 친구를 응원했지만, 고작 돌아오는 것은 4~ 5등 정도였다. 내가 친구를 도울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시골에서 꿈을 펼치기 어렵다고 생각한 친구는 어느 날 홀로 서울로 떠나갔다. 예나 지금이나 연예인이 되는 길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울 게다. 일엽편주에 몸을 싣고 망망대해를 건너려던 친구의 꿈은 높은 파도에 가로막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간간이 들리는 소식은 어느 종교에 심취해 착실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청운의 꿈을 접어야 했던 마음은 얼마나 쓰라렸을까.

이제 강산이 다섯 번이나 바뀌고도 남은 세월 그 친구는 연예인의 꿈을 포기하고 남부럽지 않은 일가를 이루고 살고 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은 자수성가라니 친구의 의지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비록 자신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친구가 자랑스럽다. 창밖 달빛이 더욱 교교하다. 컴퓨터 파일을 열었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아릿한 마음은 반세기 이전, 은비늘이 반짝이던 강가 자갈밭에서 친구가 기타를 치며 부르던 그 음성을 찾아 마구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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