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충청매일] 바람에 풀잎이 흔들린다. 빗방울이 떨어지자 파르르 떨며 물방울을 매단다. 장마철 후텁지근한 날씨가 지속 되면서 막사 주변 언덕에 풀이 무성하게 자랐다. 폭우가 쏟아지든 마른장마가 지든 장마는 장마다. 장마철이면 언덕과 밭고랑에 풀이 무성하게 자란다. 감당하기 어려우리만치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언덕의 각종 꽃나무들과 풀이 뒤엉켜 귀신이 나올 듯 스산하다. 옛날 장발족이 몇날 며칠 감지 않아 뒤엉킨 지저분한 머리 같다. 막사 주변이 이리저리 뒤엉켜 혼란스럽다. 어떻게 풀어야할지 걱정이다.

소소한 밭일이 피곤했던지 햇살이 방안 가득 점령했을 때서야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거울에 비춰진 모습을 바라보니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카락이 언덕의 풀처럼 뒤엉켜 있다. 태풍에 쓰러져있는 논바닥의 벼들 같다. 옆에서 자고 있어야할 아내가 보이지 않는다. 혼자서 일하러 밭에 나갔나보다.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다 깜짝 놀랐다. 아침 햇살을 머금고 단정한 모습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언덕이 눈에 들어왔다. 싱그러운 아름다운 자연미를 뿜어내는 색다른 언덕이다.

풀을 가위로 잘랐는지 아니면 낫으로 잘랐는지 미용실을 다녀온 아가씨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빗질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짧게 깍은 언덕에선 예쁜 소녀의 단아한 모습이 나타났다. 잘 정돈된 꽃나무, 그 사이사이를 예쁘게 깎아 꽃나무를 돋보이게 만든 미용술은 예술이었다.

아내의 가위손이 스쳐 지나간 언덕은 빛이 났다. 옛날 중학교 다닐 적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남학생은 까까머리, 상고머리를 했고 여학생은 단발머리를 했었다. 단아하고 예쁜 단발머리. 가수 조용필이 노래했다. ‘비에 젖은 풀잎처럼 단발머리 곱게 빗은 그 소녀’ 비에 젖은 풀잎이 얼마나 아름답기에 단발머리에 비교했을까. 나도 단발머리소녀를 좋아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소녀는 풀잎에 맺혔다 굴러내려 냇물 따라 흘러가버린 빗방울처럼 떠나가고 말았다. 아내는 그 소녀를 의식하고 빗방울이 맺힐 수 없게 풀잎을 잘라냈는지 모른다.

미용사는 모양만 다듬는 게 아닌가 보다. 추억과 마음도 함께 다듬나 보다. 밭에 풀이 돋아나면 친정엄마 머리의 흰머리 뽑아주듯 주저앉아 뽑아낸다. 그러면서 엄마를 떠올리나 보다.

사람은 가꿀수록 멋이 난다. 자연도 매한가지다. 깎아주고, 다듬어 주고, 심어주고, 가꾸어주면 빛이 난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의 간섭을 싫어한다. 사람과 달리 자연은 손보지 않아도 스스로 주변과 어우러지며 멋을 창출할 줄 아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사람이 가꾼 자연환경과 자연 스스로가 만들어낸 환경은 전혀 다르다. 인간은 감히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자연 미용사는 아름다움을 연출해 낸다.

우리에게 피해를 준다고 적은 아니다. 언젠가 그들로 인해 내가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런 날도 있을 것이다. 장마철 산사태도 막아주고 홍수 예방도 해줄 것이다. 우리는 뒤엉킨 풀숲엔 발 걸음하기 싫어 하지만 잘 깎고 다듬어진 풀밭에선 가족이나 연인들이 자리 잡고 휴식을 즐긴다. 그것이 미용사의 손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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