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시인

[충청매일] 경남 다호리에서 삼한시대의 붓이 발견되었습니다. 2천 년 전의 붓이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죠. 필기구의 역사에서 붓은 동양의 문화를 확정지은 놀라운 창작물입니다. 다호리의 붓에서부터 시작으로 잡아도 우리나라의 붓 역사는 2천 년을 웃돕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붓에 관한 책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2천 년을 이어온 전통문화의 핵심인 붓에 관해 소개하거나 정리한 글이 없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요? 이게 놀랍지 않으신 분은 인생을 잘못 사시는 겁니다.

활쏘기에 관한 책이 없다는 것은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됩니다. 동호인 인구라야 1만명을 겨우 웃도는 분야이니 책이 안 팔려서 그럴 수 있다고 치면 되거든요. 그러나 붓은 다릅니다. 붓은 우리나라에서 2천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물건이고, 또 온 백성이 쓰던 물건입니다. 그런데 그에 관한 기록이 없다니, 이게 놀랍지 않다면 도대체 뭐가 놀라운 일일까요?

제가 활쏘기에 관한 글을 쓰며 학자들 원망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체육학과 민속학 쪽의 학자들을 많이 욕했습니다. 돈 안 되는 영역이라고 방치하면 그건 학자의 직무유기에 해당한다는 것이 당시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세상 한 귀퉁이에 콕 박혀 조용히 살아야 할 제가 활에 관한 책을 쓰고 있자니 그럴 생각이 들 만도 하지요. 그런데 붓을 마주하고는 더더욱 학자들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전국에 서예 학원이 얼마나 많은데 붓에 대한 기록이 없단 말입니까?

영화 ‘영웅’을 보면 거기에 붓 이야기가 나옵니다. 진시황을 암살하려던 자객 중에 붓글씨로 자신의 검법을 완성한 사람이 있더군요. 1m짜리 붓대를 들고 일어서서 바닥에 글씨를 쓰는 겁니다. 내공이 없으면 도저히 쓸 수 없겠지요? 그래서 저도 그렇게 써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러자면 1m짜리 붓을 만들어줄 사람이 있어야겠지요? 농담 비슷하게 이런 얘기를 했더니 증평에 붓쟁이 하나가 산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붓방에 놀러가게 된 것이 이 책을 쓴 계기가 되었습니다.

붓에 관한 책이 없다는 사실도 붓에 대해 알아보려고 검색을 하다가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시립정보도서관에 가서 검색을 해보고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서예 학원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만든 교재에 붓에 관한 소개가 있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책들도 부실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대부분 일본이나 중국의 서예 관련 책들에서 내용을 뽑아서 소개한 것들입니다. 그러다보니 붓이나 벼루 같은 문방사우의 부분 용어들이 거의가 외국어였습니다. 실로 혀를 끌끌 찰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제가 칼을 뽑았고, 어이없게도 저의 전공과는 상관이 없는 책을 한 권 더 추가했습니다. 역시 팔리지 않을 이 책을 내준 곳은 활쏘기로 인연을 맺은 학민사(사장 양기원)였습니다.

1m짜리 붓으로 붓글씨를 써보니 한 획을 긋기도 힘들더군요. 온몸의 힘을 짜내어야만 겨우 한 획을 긋습니다. 당연히 잘 안 됩니다. 잘 될 일을 하면 재미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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