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충청매일] 하얀 도화지 위에서 크레파스가 일년을 그리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한해가 그려진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도화지 위의 크레파스가 색깔이 바뀌며 색칠된다.

고추 고구마 모종이 그려지고 밭고랑마다 참깨씨앗과 옥수수씨앗이 심겨지며 그림에 등장하고 감자 싹이 나타나면 어느새 주변이 파랗게 변해 있다. 해가 따스하게 느껴지고 봄비가 살포시 잎을 적셔준다. 오이며 수박 참외가 넝쿨을 뻗기 시작하면서 도화지 위에는 점점 공간이 사라진다.

가지마다 노랑 빨간 꽃이 그려지기 시작한다. 기다렸다는 듯 벌 나비가 날아든다. 물을 달라고 투정부리는 모습도 그려진다. 아기 눈망울 같은 조그만 열매가 맺히고 수줍다는 듯 잎사귀 뒤에 숨어 보일 듯 말 듯 그려진다.

그림이 점점 자란다. 크레파스 색깔도 짙은 색깔들로 도화지 위에 등장한다. 열매들도 제법 크게 그려져 이젠 도화지에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색이 점점 변해간다. 옥수수는 벌써 수염이 나와 늘어지고 파란 수박, 노란 참외, 보랏빛 가지와 길게 늘어진 오이가 그려진다. 자두도 어느새 검붉은 색으로 칠해지면 도화지는 제법 형형색색으로 변해간다.

도화지가 물들기 시작한다. 녹색의 잎들이 빨강 노랑 크레파스로 분장을 했다. 작고 파랗던 열매도 선분홍색으로 치장하기 시작했다. 검게 무거워진 포도송이는 철봉에 매달려 힘들어하는 아이들처럼 애처롭다가 도화지 위에서 잘라져 트럭에 실려 경매장으로 향했나 보다. 뒤늦게 말문이 터져 입을 벌린 밤송이가 알밤을 드러내 보이고, 잎에 가렸던 감은 빨간색으로 칠해지며 얼굴을 내민다. 잎도 빨갛고 감도 빨갛고 농부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가을로 가득 차려진 식탁 위에는 하얀 쌀밥과 배추 총각무가 화장한 김치로 색을 맞추고 주변엔 방금 수확해온 고구마와 잘 마른 붉은 고추가 함께 그려져 있다.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먹고 바라보고 있는 가족의 그림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식사를 마친 식탁엔 후식으로 각종 효소와 과일들이 그려져 올라간다.

어느새 들판은 비워지고 앙상한 나뭇가지와 길옆에 낙엽이 뒹굴고 있다. 이젠 도화지 위에 창고 한 채만 그려도 될 듯싶다. 바로 나뭇가지 위에 하얀 눈이 그려지겠지. 찬바람과 꽁꽁 얼어붙은 시냇물도 도화지 위를 장식하겠지. 썰렁한 도화지를 바라보며 냉이가 돋아나는 따스한 봄날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 인생의 그림도 이렇게 시시때때로 변하며 그려지고 있을 것이다. 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과 다른 내일, 내일과 다른 우리들의 앞날. 그것이 세월이요 인생일 것이다. 지금 나의 도화지 위에는 꽃들이 많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면 꽃을 좋아한다고 옛날 어른들이 이야기해 주셨다. 나도 나이가 들어가고 있는 것일 게다. 내 인생의 도화지엔 행복하고, 즐겁고, 건강한 모습만 그려졌으면 좋겠다. 아니 그러길 바란다. 나에게 그림을 그릴 기회가 주어진다면 참 좋은 아름다운 인생을 그려 넣겠다. 점점 도화지가 쌓여간다. 인생이 쌓여진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